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치안선진국으로 불리던 일본이 요즘 심상치 않다. 살인범죄율은 인구 10만명당 1명이 채 안될 정도로 낮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엽기적 사건이 수두룩하다. 특유의 ‘오타쿠’(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들) 문화 때문이라는 해석이 우세한 가운데 강력 사건 발생횟수가 적다 보니 사건이 터질 때마다 매스컴은 요란스러울 정도로 분석의 메스를 들이댄다.
최근 매스컴은 엽기 남성의 행적을 집중 보도하고 있다. 피해자는 한 젊은 여성으로 도쿄 신주쿠(新宿)역 근처에서 회식을 마치고 전철을 탄 뒤 곯아떨어졌는데 여기까지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모르는 남자의 방이어서 화들짝 놀란 피해 여성은 몰래 빠져 나온 뒤 편의점에서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에 검거된 범인은 33세의 남성으로 수사 결과 상습범으로 밝혀졌다.
경찰에 따르면 범인은 토요일 밤마다 전철에서 잠든 여성들을 골라 유유히 택시까지 함께 타고 이동했다. 집 앞에서 3층 계단을 오르는 장면도 집 주변 폐쇄회로(CC)TV 영상에 잡혔다. 이웃 주민들은 그가 택시에서 내리는 모습을 봐왔지만 잠든 공주님을 대하듯 두 팔로 안아 들고 있는 모습에 연인 사이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이런 류의 사건도 위험천만하지만 열흘 전 가나가와(神奈川)현 장애인시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일본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장애인 19명이 희생된 이 사건은 사회적 약자나 특정계층에 분풀이를 했다는 점에서 매우 비열한 범죄일 뿐 아니라, 유럽을 흔들고 있는 테러 광풍과도 별개로 볼 수 없다. 증오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선 이슬람 과격주의 세력의 행태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슬람 무장단체가 활동하진 않지만 일본도 다른 형태로 사회불안의 위기에 빠진 것이다.
이런 경향성은 증오의 극단적인 확대가 특징이다. 국적이나 정치적 주장, 인종, 성별, 동성애 등 다양한 차이에 대해 차별적으로 반응하면서 폭발한다. 재일 한국ㆍ조선인에 대한 증오와 차별이 대표적이다. 혐한단체인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모임)를 이끌어온 사쿠라이 마코토(櫻井誠)가 지난달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거둔 성적을 보면 오싹할 정도다. “일본에서 생활보호를 받지 않으면 곧 죽을 수도 있는 ‘자이니치(在日)’가 있다면 언제든지 죽어라. 빨리 일본에서 나가라”는 끔찍한 유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소 후보 중 두 번째로 많은 1.7%(11만4,171표)의 지지를 얻었다.
증오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쏟아낼 명분과 대상을 찾고 공격을 통해 희열을 얻는다. 장애인 살인마도 ‘세계 경제활성화’ ‘제3차 세계 대전 방지’‘혁명’ 같은 얘기를 떠들었다. 세계적인 저성장과 양극화, 고용을 둘러싼 소외가 정상적이던 사람들도 급진적인 방향으로 내몰고 있는 측면이 크다.
결국은 정치의 복원, 사회통합이라는 정치의 본질적 기능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극좌나 극우가 득세하고 사람들의 분노가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다. 미래가 보이지 않고 불안할 때 대중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를 갈구하기 마련이다. 이들이 때론 시원시원하게 막말도 잘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정치가 희망을 주기는커녕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치가가 되겠다는 젊은이가 드물고 국회는 세습의원과 기업집단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듯한 사람들 일색이다.
한국사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온갖 갑질과 왕따, 분노가 일상화하면서 사회는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다. 그런 사회적 토대 위에서 집권여당은 ‘분노의 녹취ㆍ폭로전’으로 자폭하고 있지 않은가. 청와대가 온갖 특권과 편법 의혹으로 얼룩진 우병우 민정수석을 두둔하면서 국민을 심리적으로 좌절시키는 이유도 모르겠다. 이러다 국민 모두가 실제로 ‘개ㆍ돼지’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언제쯤 잊혀진 정치의 복원을 통해 공동체의 해체를 막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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