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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이 오른쪽 페이지로 넘어가는 순간, 그림책은 광장이 되었다

입력
2016.08.0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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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오른쪽 지면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지엄한 명령이 떨어졌지만 오른쪽으로 굴러간 공을 따라 모든 이들이 판심을 넘어 자유를 향해 나간다. 그림책공작소 제공
책의 오른쪽 지면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지엄한 명령이 떨어졌지만 오른쪽으로 굴러간 공을 따라 모든 이들이 판심을 넘어 자유를 향해 나간다. 그림책공작소 제공

아무도 지나가지 마!

이자벨 미뇨스 마르틴스 글, 베르나르두 커르발류 그림ㆍ민찬기 옮김

그림책공작소 발행ㆍ40쪽ㆍ1만2,000원

종이책이 갈수록 위축된다. 백과사전을 비롯한 사전류는 거의 명맥이 끊어졌고, 문학서나 교양서 같은 읽을거리도 전자책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문자는 종이 위에서든 전자기기의 화면 위에서든 동일성을 잃지 않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모든 책이 전자책이 되어도 끝까지 종이책으로 남을 것이 있으니, 바로 그림책이다. 커다란 책, 조그만 책, 기다란 책, 높다란 책, 구멍이 뚫린 책, 접었다 펼치는 책, 책장의 앞뒷면으로 그림이 연결된 책…. 그림책은 형식 자체가 내용의 일부를 이룬다. 지혜로운 작가들은 종이책의 그 물성을 질료로 삼아 그림책 예술만의 표현적 가능성을 실현한다. ‘아무도 지나가지 마!’도 그런 책이다.

종이를 접어 묶은 것이 책이니, 책에는 반드시 한가운데 접힌 부분-판심이 있다. 이 책은 판심을 모티프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속표지에서 말 탄 장군이 병사에게 명령한다. “이제부터 너는 꼼짝 말고 아무도 못 지나가게 지켜!” 장군이 지키라는 것은 나라도 백성도 아닌, 고작 판심의 오른쪽 지면. 까닭도 대단치 않다. 자신만이 그곳의 주인공이고 싶기 때문. 충직한 병사는 꼼짝 않고 그 경계를 지키며 소리친다. “멈춰요! 여기서부터는 누구도 오른쪽으로 지나갈 수 없어요.” 지나가려던 사람들이 정체를 이룬다. 저마다 지나가야 하는 이유가 있건만, 병사가 지키는 이유는 단 하나, 장군의 명령이다.

정체는 극에 이르고 불만은 고조된다. 명분 없는 병사 또한 말문이 막힌다. 그때 숨통을 틔우는 것은 역시 아이들이다. 두 꼬마가 갖고 놀던 공이 경계를 넘어간 것. “군인 아저씨, 우리 공이….” 어찌 동심을 짓밟으랴. “그럼… 빨리 지나가세요. 이번 한 번만….” 아이들이 먼저 경계를 넘어서고 어른들이 뒤따른다. “어서 지나가세요. 하지만 우리끼리 비밀로 해요.” 그때 장군이 나타난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아무도 지나가지 못하게 하랬잖아!” 부하들에게 소리친다. “저 녀석부터 당장 잡아!” 하지만 군중이 가만있지 않는다. “누구 맘대로!” “그는 우리의 영웅이야!” “이 책은 우리 모두의 것이야!” 부하들도 합세한다. “야호!” “만세!”

자유로운 군중은 이미 오른쪽 지면마저 떠나갔는데, 홀로 남은 장군만이 분개하여 전형적인 ‘꼰대’의 대사를 읊조린다. “어리석은 것들 같으니라고! 지금 이 꼴이 대체 뭐야…. 아주 엉망진창이 되어버렸구나!” ‘난동’의 흔적을 바라보며 한탄한다.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겠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정말로, 그는 여전히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다.

종이책의 좁다란 판심 하나가 오만과 독선의 권력이 멋대로 세운 거대한 차벽으로 변하더니 가로 40여㎝, 세로 20여㎝짜리 지면을 광화문 광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곳에서 요지부동인 차벽이 무너지고 광장은 통행의 자유를 되찾았다. 현실에선 불가능하던 일을 가능케 한 건 동심을 담은 종이책-그림책의 힘이다. 그래서 실제로 달라진 게 무어 있느냐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대체 누구인지 생각해 본 사람들이 생겼다. 적어도 이 책을 본 사람만큼은. 모든 책이 다 사라진다 해도 끝까지 남아야 할 책이 있으니 바로 그림책이다, 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다.

김장성 그림책 작가ㆍ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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