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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음료를 완성하는 얼음의 조건, '슬로 아이스'

입력
2016.08.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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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팜에서 가공한 다양한 형태의 얼음들. 투명하고 단단한, 잘 녹지 않는 얼음이다.
아이스팜에서 가공한 다양한 형태의 얼음들. 투명하고 단단한, 잘 녹지 않는 얼음이다.

얇은 유리 잔을 움켜쥐자 서늘한 한기가 전류처럼 통했다. 입술에 그 가녀린 테두리가 먼저 닿았다. 시원한 액체가 입 안으로 왈칵 흘러 들어온다고 생각했을 때, 차가운 고체가 콧잔등에 부딪혔다. 얼음이었다. 얼음은 마치 스텔스 모드를 켠 잠수함처럼 액체 안에 투명하게 숨어 있었다. 유리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는 요정의 노랫소리처럼 곱고 맑았다. 잔을 비울 때까지도 얼음은 거의 그대로였다.

열사(熱死)의 오후, 살겠다고 움켜쥔 아이스카페라테는 플라스틱 겉면에 온통 땀을 붙이고 있었다. 우유와 커피가 뒤섞인 시원한 음료는 아껴 마실수록 괴상한 맛을 냈다. 얼음이 반쯤 녹은 그것은 더 이상 아이스카페라테가 아니었다. 아이스카페라테는 얼음이 녹기 전에 콸콸 마셔야 하는 음료다. 맛을 놓고 본다면 우유가 섞이지 않은 아이스커피 역시 마찬가지다. 얼음이 녹아 물이 섞이면 원래의 맛이 흐트러진다.

전자는 몇 해 전 도쿄 긴자의 한 바(bar)에서 만났던 얼음이다. 잘 녹지 않고, 단단해 치아로 깨기 힘들다. 후자는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업소용 제빙기에서 나온 뿌연 얼음이다. 그리 단단하지 않아 빙과처럼 깨물어 먹기에 차라리 좋다. 전자는 이제 서울의 바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게 되었고, 후자는 여전히 어느 업소에서나 사용하고 있다. 가정에서 쓰는 정수기나 냉장고가 만들어내는 얼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스팜의 아이스볼은 한 번에 여섯 개가 깎여 나온다. 이 얼음은 테두리의 거친 면을 수작업으로 한 번 더 다듬은 후 포장되어 판매된다.
아이스팜의 아이스볼은 한 번에 여섯 개가 깎여 나온다. 이 얼음은 테두리의 거친 면을 수작업으로 한 번 더 다듬은 후 포장되어 판매된다.

고대 사막에도 있었던 냉각 기술

맛있는 얼음이란 무엇일까? 우선 앞서의 예를 통해 보자면 질문부터가 틀렸다. ‘맛있는 얼음’이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얼음은 물이다. 물이 빙점 이하의 온도에서 고체가 되어 있는 상태에 대한 묘사이며, 온도 그 자체다. 음식에 있어 얼음은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도를 식히고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다. 단지 도구다. 온도를 지닌 식기의 보조역이자, 열기구(熱器具)에 반대되는 개념의 조리 도구이기도 하다.

인류가 불을 다루게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얼음을 정복한 것은 상대적으로 최근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자연이 시연하는 냉각 현상의 실마리를 열심히 봐뒀다가 똑같이 재현했을 뿐이었다. 바람이 불면 땀이 마르고, 땀이 마른 피부가 시원해진다. 물이 증발할 때 열을 가져가는 현상을 이용해 고대의 냉장고가 저 멀리 사막에 존재했고, 그로 인해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암포라(진흙으로 만든 항아리) 속 시원한 와인을 매일 밤 마실 수 있었다. 수분의 증발을 도울 사막의 모래바람조차 없는 밤, 왕의 노예는 겉에 물을 뿌린 암포라에 부채질을 해 바람을 만들어냈다. 수분이 바람에 증발되면서 안의 내용물이 식혀진다. 고대의 냉각 기술이다.

이후 물리와 화학이 발전을 이어온 끝에 1800년대에 이르러 제빙기가 탄생했고, 1900년대에는 현재와 원리가 별다를 바 없는 가정용 냉장고도 진작에 발명되었다. 겨울철 호수 등에서 건져 올려 그 안의 온갖 몹쓸 병까지 덤으로 얻게 했던 천연 얼음 대신 깨끗한 물로 기계에서 얼린 안전한 인공 얼음이 인류와 함께 하게 됐다. 얼음은 아바나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음료를 차갑게 식혔고 범선에 실은 소고기나 과일의 온도를 얼기 직전까지로 떨어트려 안전하게 보존했다.

얼음을 절단 중인 아이스팜 정준양 대표. 얼음 주문량만으로 서울 시내 바의 매출 순위를 매길 수 있을 정도로 영업이 호조이지만 그는 대대적인 재투자를 계획 중이다. 대빙을 구입해 쓰는 대신 얼음을 직접 얼려 쓰겠다는 계획이다.
얼음을 절단 중인 아이스팜 정준양 대표. 얼음 주문량만으로 서울 시내 바의 매출 순위를 매길 수 있을 정도로 영업이 호조이지만 그는 대대적인 재투자를 계획 중이다. 대빙을 구입해 쓰는 대신 얼음을 직접 얼려 쓰겠다는 계획이다.

단단한 얼음이 천천히 녹는다

‘맛있는 얼음’의 형용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표현은 ‘맛있게 하는 얼음’이라는 말이다. 간이 잘 맞은 찌개를 의심하며 물을 더 부었을 때 맛이 희한하게 변하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물은 맛의 훼방꾼이다. 이미 맞은 간을 망가뜨린다. 모든 음식이 그렇듯, 칵테일이나 커피 같은 음료 역시 ‘간이 잘 맞은’ 상태여야 맛이 좋다. 얼음이 녹아버린 칵테일, 아이스카페라테에서는 기껏 맞은 간이 망가진다. 얼음은 음료를 식히되, 자신이 녹지는 않아야 한다. 정확히는 최대한 천천히 녹아야 한다.

쉽게 녹지 않기 위해서는 얼음이 잘 얼려져야 한다. 가정용 냉장고의 얼음은 금세 녹는다. 업소용 제빙기도 가장 좋은 것을 사면 녹는 속도를 늦출 수 있지만 대개는 금세 녹는 얼음이 나온다. 맛있게 하는 얼음은 얼리는 온도에서부터 시작된다.

투명한 얼음은 한 번 끓여 물에 녹아 있는 기체를 날려낸 물로 얼렸을 때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투명하다고 해서 다 맛있는 얼음인 것이 아니다. 관건은 얼리는 온도 단 하나다. 물은 수소 둘, 산소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수소와 산소는 서로 반대의 전하를 띈다. 그래서 물은 접착성이 높다. 얼음끼리 쉽게 달라붙는 것을 기억해보면 될 것이다.

낮은 온도에서 급속냉동하면 분자는 자유분방하던 실온에서의 형태대로 고정된다. 불안정하다. 금방 녹는다. 높은 온도에서 얼리면 얼음을 얻기까지 시간은 더 걸리지만 얼음의 분자가 안정적으로 붙어 있다. 더 천천히 녹는다. 기억해 보자. 편의점 등에서 사온 얼음은 집에서 얼린 것보다 천천히 녹는다. 그리고 얼음 자체도 훨씬 단단하다. 얼음 공장에서 품질 좋은 얼음을 얻기 위해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에서 오래 얼렸기 때문이다. 영하 15도 정도에서 얼린다. 이틀이 걸린다.

얼음 가운데 형성되는 흰 심은 물 속에 녹아 있는 H₂O 이외의 것들이다. 우리가 마시는 생수는 완벽한 H₂O가 아니다. 달콤한 약수물 역시 마찬가지다. 공기 중의 각종 기체, 미네랄 등이 녹아 있다. 얼음이 어는 동안 이것들이 H₂O끼리의 결합에서 밀려나 가운데로 몰린다. 이 부분의 얼음은 잘 녹고, 맛이 없다.

아이스팜의 아이스볼 제조 과정.
아이스팜의 아이스볼 제조 과정.

완벽한 얼음 지향하는 얼음 공장

얼음이 음식을 맛있게 하기 위해서는 모양도 중요하다.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폭염주의보가 또 오전부터 발령됐지만 공장 안은 겨울이었다. 동부간선도로를 따라 의정부 너머, 경기 양주시의 시골길을 따라 들어가야 겨우 닿을 수 있는 아이스팜이라는 이름의 얼음 공장이다. 스물다섯 평 남짓한 공장에서 얼음을 가공하는 작은 공장이지만 특수한 모양의 얼음으로 대박이 난 업체다.

아이스팜에서는 의정부의 얼음 생산 업체에서 ‘대빙’을 받아 쓴다. 크기는 높이 110㎝, 너비 55㎝, 깊이 26㎝로 커다란 쌍쌍바처럼 생겼다. 결혼식장을 빛내는 얼음 조각의 재료가 되기도 하는 크기의 얼음이다. 물론 깨끗한 물로 얼리기 때문에 식용으로도 적합하다. 앞서 설명한 대로 영하 15도 내외에서 이틀간 얼리는 이 얼음은 심 부분에서 냉기를 심고 얼음이 다 얼고 나면 심이 있던 부분에 물을 부어 마저 얼려 길쭉한 얼음 육면체를 완성한다.

아이스팜이 하는 일은 이 커다란 얼음을 다양한 모양으로 자르고 깎아내 납품하는 일이다. 가운데 심 부분은 버리고, 위생에 한 번 더 만전을 기하기 위해 겉면도 모두 깎아내 버린다. 대빙 하나를 가져와 3분의 1은 버리는 셈이다. 음료를 맛있게 하는데 최적화된 단단하고 잘 녹지 않는, 투명한 얼음을 원하는 바가 주요 고객이고, 몇몇 카페에서도 맹탕이 되지 않는 커피를 만들기 위해 이곳의 얼음을 받아 쓴다.

이 공장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희귀한 모양의 얼음은 완벽한 구형의 ‘볼’ 얼음이다. 6㎝, 6.5㎝, 7㎝ 세 가지 크기의 구형 얼음을 만들어내는 건 국내에서 최초로 도입한 일제 얼음 가공 기계다. 얼음이 녹는 것은 얼음에 닿는 액체, 그리고 공기가 가진 온도를 통해서다. 온도에 노출되는 표면적이 적을수록, 즉 각이 적을수록 얼음은 자신을 더 오래 지킨다. 그래서 싱글몰트 위스키 등 온도는 식히되 원래의 술맛 그대로 마셔야 할 때 이런 볼 얼음이 사용된다. 솜씨 좋은 바텐더들은 모두 ‘아이스 카빙(ice carving)’이라고 하는 얼음 깎는 기술을 갖고 있지만 일일이 손으로 깎기엔 노동력이 부족하다.

얼음을 넣고 핸들을 돌리면 원하는 모양의 육면체를 만들 수 있다. 직각 방향으로 돌리면 반듯한 육면체가, 사선으로 돌리면 마름모꼴 모양의 육면체가 나온다. 사진의 얼음은 촬영을 위해 시연한 것으로, 촬영 후 모두 폐기했다.
얼음을 넣고 핸들을 돌리면 원하는 모양의 육면체를 만들 수 있다. 직각 방향으로 돌리면 반듯한 육면체가, 사선으로 돌리면 마름모꼴 모양의 육면체가 나온다. 사진의 얼음은 촬영을 위해 시연한 것으로, 촬영 후 모두 폐기했다.

그 외에도 기계는 여러 대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모두 직선운동을 하는 전기톱들이다. 대빙을 작게 자르는 커다란 전기톱, 그것을 다시 원하는 크기의 육면체로 잘라내는 작은 전기톱, 그리고 얼음 판을 넣고 이리 저리 돌리면 순식간에 원하는 각도의 육면체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상상할 수 있는 얼음 가공 기계들이 있다. 이런 육면체 얼음은 바에서 손수 볼 형태를 카빙할 때 재료로 쓰는 커다란 큐브, 혹은 칵테일에 넣는 길쭉한 육면체, 혹은 정육면체 얼음들이다. 그리고 잘게 부순 얼음,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몰디브, 아니 모히토 같은 칵테일에 사용되는 크러시드(crushed) 얼음도 도정기처럼 생긴 기계에서 자동으로 만들어진다.

이 공장의 정준양 사장은 생계 수단으로 얼음 소매를 시작했다가 이내 얼음에 꽂히고 말아 여기까지 왔다. 일본에 견학, 연수를 자진해 다녀오고 국내에는 제대로 나와 있지도 않은 얼음 관련 서적과 자료를 뒤져 보기도 하며 얼음을 파내려 가고 있다. 72시간 이상 얼려 더 투명하고 단단한 얼음이 우선 그의 목표이고, 일본에서 봤다는 120시간 얼린 얼음은 그의 이상향이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사진 강태훈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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