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이 명제를 말이 아닌 실력으로 증명하는 당찬 10대들이 있다. 하이틴 여배우 3인방으로 불리는 김유정(17)과 김소현(17) 김새론(16)이다. 이들은 인생의 절반을 촬영장에서 보낸 연기 베테랑들이다. 출연작 개수만 따져도 데뷔가 가장 늦은 김새론이 20여편이고, 김소현은 30여편, 김유정은 40편을 훌쩍 넘긴다. 웬만한 중견배우 못지않다.
그 동안 세 배우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거나 성인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에서 10대 배역을 맡곤 했다. 하지만 최근엔 행보가 크게 달라졌다. 미니시리즈의 타이틀롤을 맡아 로맨스 연기까지 소화하며 이른 나이에 성인 연기자로 도약하고 있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학원물에도 20대 배우가 출연하던 과거와 비교하면 상당히 도발적인 변화다.
◆10대 여배우 드라마 대표작 최고시청률
※닐슨코리아 집계.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1994년 KBS 추석특집극 ‘춘향전’에 당시 고교 3학년이던 김희선과 이민우가 발탁돼 화제가 됐다. 제작진은 “기존 춘향과 몽룡이 원작의 주인공들보다 연로했었는데 이제서야 이팔청춘에 근접한 연기자들로 작품이 만들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로선 얼마나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는지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20여년 전 시각에서 보면 JTBC 드라마 ‘마녀보감’의 김새론은 파격을 넘어 혁명에 가까운 캐스팅이다. 이 드라마에서 저주에 걸린 비운의 공주를 연기한 김새론은 시간 흐름에 따라 10대부터 20대까지 연기했다. 성인 연기가 처음인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상대역 윤시윤과의 14살 나이차가 무색할 만큼 로맨스 연기도 무난하게 소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김소현은 tvN 드라마 ‘싸우자 귀신아’에서 성인 연기자 신고식을 치르고 있다. 열아홉에 죽음을 맞이한 소녀 귀신 김현지 역을 맡아, 퇴마사 박봉팔 역의 옥택연과 오싹한 로맨스를 펼치는 중이다. 제작진은 “김소현의 이미지가 원작 웹툰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캐릭터와 잘 맞아 원작팬들도 크게 반겼다”며 “그 동안 쌓아온 연기력이 이 드라마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김유정은 22일 첫 방영을 앞둔 KBS2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왕세자(박보검)와 사랑에 빠지는 남장 내관으로 출연한다. 2012년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여진구와 호흡을 맞춰 로맨스 연기를 선보인 경험이 있지만, 당시엔 여주인공 한가인의 아역이었다.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프라임 시간대를 오롯이 책임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제작진은 “김유정의 연기력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캐스팅할 때 10대 나이가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고 말했다.
이들이 성인 연기에 도전할 수 있었던 데는 드라마의 장르적 특성도 뒷받침이 됐다. 한 방송 관계자는 “세 작품 모두 판타지물이고 극중 나이대가 모호해 성인 연기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는 10대 여배우들에게 잘 맞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20대 여배우 기근 해소할까
이들 3인방의 주가가 치솟는 데는 작품을 믿고 맡길 만한 20대 여배우가 부족한 현실도 작용했다. 특히 20대 초반 나이대 여배우는 ‘기근’이나 다름없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눈에 띄는 주연급 20대 여배우는 김고은과 박소담 정도밖에 없다”며 “김유정과 김소현, 김새론은 10대 나이에도 검증된 연기력과 인지도를 갖추고 있는 데다 작품 한 편을 끌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어서 제작진이 믿고 캐스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10대 배우들이 아역에서 벗어나 성인 역할에 도전한다는 자체가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세 배우가 빼어난 연기력을 바탕으로 ‘아역 배우’가 아닌 ‘여배우’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은 주목해볼 만하다.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세 배우의 연기는 나이를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돋보인다”며 “최근의 행보는 아역에서 성인 역으로 넘어가는 단계라기보다는 배우로서 연기 폭을 확장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고 높이 평했다. ‘싸우자 귀신아’의 제작 관계자도 “10대들이 자신의 목소리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한 최근 사회 분위기처럼 10대 배우들도 연기 면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내기 시작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세 배우를 통해 10대 미성년에 대한 사회 인식 변화의 징후를 읽는 시각도 있다. 윤 교수는 “요즘 10대는 과거보다 훨씬 성숙하지만, 미성년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각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10대 배우를 아역배우로 규정짓는 것도 경직된 시선이고 편견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 배우가 연기의 영역에서 인식 전환을 이뤄가고 있다”며 “이들이 독자적인 연기 세계를 구축하고 인정받으면서 세대 인식을 바꿔가는 데 중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분석했다.
하지만 10대 배우들의 성인 연기를 불편하게 보는 시각은 엄연히 존재한다. 제작진이 표현 수위와 방법 등에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한 드라마 제작자는 “드라마 연출에서도 시청자들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10대 배우들의 감성을 배려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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