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부산 해운대 도심에서 17명의 사상자를 낸 교통사고는 뇌전증(간질) 환자인 운전자의 발작 증세가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고 운전자 김모씨는 지난해 9월 뇌전증 진단을 받고 하루 두 번 처방약을 복용해 왔으나 그날은 약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담당 의사는 “환자가 하루라도 약을 복용하지 않을 경우 의식을 잃을 수 있다”고 했고, 김씨는 사고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운전 부적격자가 무리하게 운전대를 잡았다가 끔찍한 사고를 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사고 위험성이 큰 운전자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현행 운전면허 제도에 있다. 김씨는 지난해 뇌전증 진단을 받고도 지난달 면허 갱신을 위한 적성검사를 별 문제 없이 통과했다. 적성검사에서는 간단한 신체검사만 했고 뇌전증 검증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도로교통법에는 뇌전증 환자는 정신질환자와 함께 면허 취득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면허시험 응시자나 적성검사 대상자가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속수무책이다.
뇌전증뿐만이 아니다. 당뇨병이나 치매 환자 등 각종 질환자에 대한 운전면허 관리가 허술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당뇨병으로 인한 저혈당 증세에 빠지면 운전자가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어 대형 사고를 일으킬 위험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실제 지난 2월 당뇨병을 앓던 시내버스 운전기사가 저혈당 쇼크에 빠져 마주 오던 화물차와 충돌해 운전자를 숨지게 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인지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는 치매 환자가 낸 교통사고도 적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선진국은 만성ㆍ중증 질환자의 상태에 따라 운전면허 발급과 갱신을 엄격히 제한하는 추세다. 미국의 경우 당뇨병 환자는 별도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면허를 갱신하고, 유럽은 5년마다 의료진의 소견서를 당국에 제출토록 하고 있다. 치매 환자도 별도의 운전 능력 테스트를 거치게 하는 등 다양한 제한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이번 사고에서 드러났듯 형식적 적성검사로는 부적격 운전자를 가릴 수 없다. 질병을 지닌 운전자를 걸러내기 위해 건강보험 자료를 활용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무분별한 개인정보 제공으로 인한 사생활 침해가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김씨는 이번 사고 외에 최근 3년 동안 세 차례나 교통사고를 냈으나 보험회사만 알고 있었다. 이런 정보가 경찰에 의무적으로 보고돼 면허 재발급 과정에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시민들이 길에서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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