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이 넘어 다시 찾아간 런던은 정겨우면서도 낯설었다. 고풍스러운 대리석 건물들은 그대로이건만, 네온 사인의 불빛과 가게 안의 인테리어는 영국치고 꽤나 현대적으로 변모했다. 가난한 희망을 품고 유학길에 오른 나는 점심 한 끼를 버거킹으로 때우려던 참이었다. 매장 안의 테이블 곳곳은 손님들이 버리고 간 잔여물로 지저분했다. 순간 생각했다. ‘이제 영국에선 점원이 테이블을 치우지 않나? … 셀프서비스?’ 제자리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니, 점원이 터덜터덜 걸어 들어와서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다시 속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테이블의 식판이며 플라스틱 용기며 햄버거 포장지를 하나씩 하나씩 쓰레기통을 오가며 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일을 뭐 그따위로 하고 있냐’고 한마디 해 주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야만 했다.
한동안 영국에서 살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대체로 평균이나 그 이하 계층에 있는 영국 사람들의 노동생산성은 한국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3분의 1이 될까 말까였다. 영국 사람들에 비하면, 한국의 알바(아르바이트)나 점원이나 사무직 직원이나 관공서 직원은 ‘빛의 속도’로 일을 신속하고 빠릿빠릿하게 처리한다.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깊은 의문이 생겨났다. ‘버거킹 매장의 알바는 한국이 영국보다 적어도 3배는 더 일을 잘하는데, 왜 한국은 영국보다 잘살고 있지 못한 걸까.’ 가만히 내 마음속의 의문을 ‘버거킹 패러독스’라고 이름 붙였다.
영국 체류 기간 여러 분야의 일을 하면서 나는 점차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중간 이하의 영국 사람들은 마찬가지 위치에 있는 한국사람들 역량의 3분의 1밖에 안 되지만, 위로 갈수록 영국 상층부 사람들의 역량이 한국 상층부 사람들보다 적어도 3배는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차이가 비교적 쉽게 드러나는 예는 정책 보고서였다. 종종 작성자의 이름으로 호칭되는 영국의 정책 보고서는 많은 경우 철학자와도 같은 석학 수준의 통찰력에서부터 출발한다. 매우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정책을 다루면서도 가장 높은 추상 차원의 사고에서부터 출발해서 현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가장 실용적인 정책적 제안까지의 논리를 일관되게 연결한다. 철학적 사고에 기반한 실용적 방법론이 ‘제국’을 이끌어 온 힘의 원천임을 체험해 온 국가의 인재들이 발휘하는 리더십이 느껴진다.
반면, 개조식 문장(글을 짧게 끊어 요점만 나열하는 문장)에 갇혀 있는 한국의 정책 보고서들은 마치 학부 1, 2학년생이 얼기설기 짜놓은 도표들과 정책 세일즈 문구로 가득한 기말 리포트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책 당사자들은 한국 특유 사회문화에 길들어 자신들의 상대적 무능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방학 때 한국에 들어와 몇 달간 정부 관공서에서 통ㆍ번역 알바를 한 적이 있었다. 해당 부서에서 외국의 사례를 모방하여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려던 참이었다. 영어로 쓰인 내용을 보니, 외국에서 해당 정책을 입안한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는 용어의 번역도 정확하지 않게 될 위험성이 있었다. 담당 사무관에게 물었다. “저, 외국에서 이 정책을 추진하게 된 역사나 사회적 배경이 어떻게 되는지 혹시 아시나요.” 그때 그의 반응은 뭔가 전형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료에게 몸을 돌리며) 아하하 … 번역하는 선생님이 이 정책의 배경이 뭐냐고 물어보네. 아하하”
공무원 담당자가 도입하는 정책의 배경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했다. 요즘 고위 공무원의 ‘개돼지’ 발언이 물의를 빚고 있지만, 아마도 그러한 ‘실수’는 단순한 선민의식의 발로만은 아니지 싶다. 무지와 무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거버넌스 시스템을, 어떻게 하면 진정한 실력 위주 사회체계 ‘메리토크라시’로 이끌 수 있을까.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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