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당들 “돈 돌려주겠다” 유인
시비 걸며 주머니에 필로폰 봉투
때마침 경찰 들이닥쳐 현장 연행
마약사범 몰리며 3개월 옥살이
도박단 내분으로 전모 드러나
명동사채왕이 배후로 밝혀지기도
작년 돈 받은 판사 구속 반전 기회
“기억도 싫지만 진실 꼭 밝힐 것”
사기 도박으로 거액을 날리고 마약 범죄까지 뒤집어 써서 억울하게 수감생활을 했던 50대 사업가가 사건 발생 15년 만에 명예회복에 나섰다. 자신이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의 재판과정에서 뒤늦게 알게 된 사업가 신모(57)씨는 최근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는 1일 “인생을 파탄 냈던 사기꾼들도 용서하기 힘들지만 이를 바로잡지 못한 경찰과 검찰, 법원의 행태에 더욱 화가 난다”고 말했다. 15년 전 그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고, 어떻게 진실을 접하게 됐을까.
돈 받으러 갔다가 마약사범 누명
2001년 12월 13일 신씨는 서울 방배동의 한 다방으로 다급하게 향했다. 그는 도박판에서 날린 7억원 중 일부를 돌려 받기로 돼있었다. 그저 운이 없어서 돈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신씨가 사기도박단에 속았다는 걸 알고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도박단이 돈을 돌려주겠다고 한 것. 신씨는 사기도박단 일원인 장모씨와 다방으로 들어섰지만 다방 안에는 남성 1명과 여성 2명이 앉아 있었을 뿐 돈은 없었다. 분위기가 이상한 걸 느낀 신씨가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장씨가 다짜고짜 시비를 걸면서 몸싸움이 시작됐다. 그 틈에 다방에 앉아있던 여성 정모씨가 싸움을 말리는 척하며 신씨 호주머니에 필로폰이 들어있는 흰 비닐봉투를 몰래 집어 넣었다. 마침 다방에 들이닥친 경찰은 신씨를 연행한 뒤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마약이 발견됐다”고 외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약전과 한 번 없던 신씨는 졸지에 마약사범으로 체포돼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신씨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검찰과 법원에서도 혐의는 벗겨지지 않았다. 사기도박으로 거액을 날린 신씨는 마약전과까지 덧씌워져 범죄자로 낙인 찍혔다. 신씨는 이후 수사기관과 법원을 냉소하며 체념 속에 살았다.
사채왕ㆍ판사 사건으로 수면 위로
신씨가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7년 뒤였다. 사기도박단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자기들끼리의 비밀이 드러난 것이다. 사건 배후에 ‘명동 사채왕’ 최진호(61)씨가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마약을 신씨 호주머니에 넣었던 정씨는 검찰에서 사건의 전말을 폭로했다. 신씨에게 돈을 돌려주지 않기 위해 ‘던지기’ 작업을 하기로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라는 것이었다. 당시 다방에 있던 세 명이 최씨와 그 내연녀 한모씨, 그리고 자신이었다고 정씨는 밝혔다.
검찰이 최씨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면서 신씨는 누명을 벗을 줄 알았다. 하지만 최씨는 구속되리란 예상이 어긋난 것은 물론 법원에서도 무죄판결을 받았다. 최씨가 당시 신임법관 연수를 받고 있던 최민호 전 판사에게 금품을 제공하며 도움을 받은데다, 증인들에게 경제적 이득을 약속하며 진술을 번복하도록 회유했기 때문이다. 신씨는 크게 낙담했다.
그러나 2012년 최씨가 구속되고 2015년 최 전 판사까지 구속되면서 신씨는 드디어 누명을 벗을 기회를 얻게 됐다. 정씨와 한씨가 구체적인 증언을 한 덕분에 15년 전 신씨의 호주머니에서 발견됐던 마약은 최씨의 지시로 정씨가 집어 넣은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범죄자와 법조인의 결탁이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다. 한씨는 지난해 최 전 판사의 재판에서 “2008년 최씨가 최 전 판사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최씨는 구속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랬다면 신씨도 억울함을 풀 수 있었지만 법원은 당시 최씨에게 면죄부를 줬다. 신씨는 “기억하기 싫은 일이지만 진실을 꼭 밝혀 자식들에게 떳떳한 부모가 되고 싶다”며 재심청구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강철원 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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