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에 부제를 하나 달아보면 어떨까. ‘덕혜옹주의 남자’ 혹은 ‘덕혜옹주의 연인’이라고. 제목 뒤로 겸손하게 존재를 감추기엔 배우 박해일(39)의 연기가 너무나 아깝다.
영화는 독립투사 김장한(박해일)의 시선을 통해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손예진)의 일대기를 그려낸다. 열세 살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해방이 되고도 십수년이 지나서야 고국으로 돌아온 덕혜의 삶은 김장한에 의해 숨결을 갖는다. 김장한은 덕혜의 어린 시절 정혼자로 기록에 남아 있는 인물로, 영화적 상상력이 더해져 스크린 위에 부활했다. 영화 속 장한은 일본에서 강제 유학 중인 덕혜와 재회한 후 일제에 맞서 덕혜를 지키는 일에 운명을 바친다.
지난 2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해일은 “관객에게 덕혜의 삶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렌즈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렌즈와 피사체의 사이의 공간은 영화 속 인물 관계에 반영된다. 서로에게 연정을 품고 있으나 시대의 격랑 속에 더는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덕혜와 장한 사이에는 말로 다 풀어낼 수 없는 애틋함과 그리움과 회한이 쌓여 있다. 투철한 신념인 듯도 하고 애절한 순애보 같기도 한 박해일의 감성 연기가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이 영화가 비극임에도 로맨틱한 정서를 품고 있는 이유다.
“허진호 감독의 장기인 것 같아요. 허 감독이 그동안 보여준 멜로 감성이 이 영화에서도 통할 거라고 봤어요. 감독님의 이전 작품에서도 그랬듯 장한과 덕혜 사이에도 미묘한 거리감이 존재해요. 계급과 신분, 상황과 처지의 차이 때문이겠죠. 덕혜와 정혼한 사이였다는 사실이 장한을 움직이는 동력이라고 생각했어요. 관객들이 로맨틱함을 느꼈다면 그 지점을 잘 봐주셨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암울한 시대에 진지하게 접근해볼 수 있는 캐릭터를 기다려 왔다”는 박해일은 시나리오에서 큰 호기심을 느꼈다. 먼저 캐스팅된 손예진과의 호흡도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예진씨를 만났을 때 작품을 위한 준비를 모두 끝낸 듯한 인상을 받았어요. 나도 빨리 이 작품에 안착해야겠다는 생각에 준비를 서둘렀죠. 지난해 봄에 출연을 결정하고 11월 크랭크인까지 계속 자료를 보고 그 시대를 담아낼 수 있는 말투를 연구했어요. 감독님은 배우들의 연기톤에 맞춰 시나리오를 계속 수정하셨고요.”
박해일 손예진 맞춤형 시나리오 때문일까. 첫 만남 같지 않게 두 사람의 연기 호흡이 좋다. 심지어 서로 닮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얘기를 종종 들었어요(웃음). 그런데 사실 허 감독과 예진씨가 더 닮았어요. 덕분에 저도 자연스럽게 닮아갔나 봅니다.”
‘은교’에서 노역 특수분장을 하느라 고생했던 박해일은 이 영화에서도 노년 분장을 했다.
“은근히 노역 분장에 중독이 돼 버렸나 봐요(웃음). 작품을 통해 굉장히 좋은 경험을 했고 배우로서 무기를 하나 장착한 느낌입니다. 캐릭터의 확장성이란 측면에서 배우에겐 장점이 되는 것 같아요. 덕분에 물리적으로도 편한 느낌으로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은교’ 이후로 다시는 노역 분장을 하지 않겠다”던 결심을 스스로 깨뜨리면서까지 ‘덕혜옹주’에 애정을 쏟은 박해일은 “극장문을 나서면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인물들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어질 거라 확신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살아온 감성과 앞으로 살아갈 감성이 담긴 영화이니 관객들도 깊이 공감해주길 바란다”고도 말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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