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개막이 6일 앞으로 다가왔다. 1971년 창설한 봉황대기는 기존의 중앙 언론사 주최 대회와 달리 지역 예선 없이 전국의 모든 교교팀이 아무런 제한 없이 출전해 ‘한국의 고시엔’으로 불리며 42년간 일선 고교와 야구팬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조희준(55) 프로스포츠협회 위원이 한양대 대학원에서 최근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한국야구 발전에 기여한 백상 장기영에 관한 연구’는 봉황대기 창설을 주도했던 백상 장기영의 업적을 통해 봉황대기가 한국 프로야구 탄생의 초석이 된 사실을 고증했다. 조 위원은 일본 호세이대학 출신으로 일본야구에 조예가 깊고,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20여년간 운영ㆍ국제부장으로 야구 행정을 다루며 쌓아 온 지식과 인맥을 바탕으로 2년여에 걸쳐 논문을 완성했다. 그는 “경제인이자 정치인이었고, 언론인이자 체육인이었던 백상 장기영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스케일의 소유자였다”고 말했다.
봉황대기를 낳은 한국야구 최초의 대형 이벤트
조 위원의 논문에 따르면 한국 스포츠 마케팅의 시초는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민국 최초의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는데 당대 메이저리그 최강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한국을 찾아 친선경기를 펼친 것이다. 조 위원은 논문에서“1954년 태양신문을 인수해 한국일보를 창간한 백상 장기영이 홍보를 위해 기획한 이벤트였다. 당시 시즌을 마친 세인트루이스는 필리핀을 방문한 뒤 일본 오키나와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장기영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세인트루이스를 서울로 불러들인 것이다. 카디널스 선수단을 태우고 마닐라 공항을 출발한 CAT 항공은 10월21일 오전 11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프레드 허치슨 감독을 비롯해 당시 빅리그 최고 1루수였던 스탠 뮤지얼, 투수 린디 맥대니얼, 포수 핼 스미스 등 유명 선수들이 포함돼 있었다. 장기영 사장을 비롯해 이홍직 대한야구협회장, 선우인서 전서울 단장, 금철 섭외위원 등이 공항에서 이들을 영접했다”라고 적었다. 세인트루이스와 맞붙은 한국 대표팀은 육ㆍ해ㆍ공군 야구단에서 모인 ‘전(全)서울군(軍)’으로 전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 박현식 등이 포진한 한국의 올스타 팀이었다.
조 위원은 “당시 신문에 실린 흑백 사진을 보면 관중석에 모인 인사들은 모두 양복을 입고 있다. 대회 위상을 짐작케 한다”고 말했다.
재일동포 야구단을 흡수한 백상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의 획기적인 발상 중 하나는 재일동포 야구팀의 출전이었다. 조 위원에 따르면 장기영은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를 다니던 1933년 모교가 여름 고시엔 대회의 조선지역 예선인 ‘제13회 전선중등학교야구대회’ 결승에서 목포상업을 5-1로 제치고 일본 본토에서 열린 고시엔 본선에 출전하자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품고 훗날 실천에 옮겼다. 본보 창간 직후 일본팀 초청 경기를 기획했는데 당시 한국은 일본과 수교국이 아니어서 벽에 부딪히자 장기영은 일본인은 아니지만 그들과 비슷한 야구 실력을 갖추고 있는 재일동포에게 눈을 돌렸다. 조 위원은 “당시 한국은 일본과 수교국도 아니었을 뿐더러 반일주의자인 이승만 정권 시절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추진력, 이어 재일동포로 눈을 돌린 발상은 실로 대단했다”고 말했다.
1956년 7월28일 토요일 본보 3면에는 ‘본사가 보내는 공전(空前)의 대구연(大球宴)’이란 특집물이 실렸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경기’의 시작이었다. 조 위원은 “장기영은 아예 재일동포 야구단까지 참가하는 고교야구대회를 구상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대회가 1971년 8월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제1회 봉황대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 겸 한국고교야구연맹 창립 기념 고교야구대회’였다. 방학 중인 8월로 시기상의 문제도 해결했다”고 기술했다. 재일동포 팀은 1972년 2회 대회부터 참가해 1997년까지 한국을 찾아 한국 야구 발전의 큰 밑거름이 됐다.
왜 ‘봉황’(鳳凰)이었을까
조 위원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발탁된 인연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특별한 애정과 존경을 갖고 있는 장기영으로서는 전국고교야구대회 명칭을 대통령이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봉황대기 창설 3년 전 고교야구대회를 먼저 시작한 중앙일보가 ‘대통령’이라는 용어를 선점했다. 조 위원은 “아마도 대통령의 공식표장인 ‘봉황’이라는 용어를 대회 명으로 선택했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장기영은 ‘한국의 고시엔’을 만들자는 취지에 따라 지방 예선대회에서 탈락 경험이 있는 모든 고교야구팀에게 전국대회 참가 자격을 부여했다. 조 위원은 “봉황대기 고교야구의 탄생이 없었더라면 호남의 명문이면서 야구부가 있었던 전남고, 광주고 등은 서울운동장 마운드를 평생 밟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면서 “장기영의 기획이 무명 선수들에게 꿈을 선사했다”고 봉황대기의 의미를 되짚었다. 그는 “장기영이 한국 야구 발전에 기여했던 초석은 결국 한국 프로야구를 탄생시켰고, 한국 야구가 국제무대에서 탁월한 활약을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성환희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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