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몸 담고 있는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면, ‘낙하산’은 끓어오르는 정의감을 거스르기는 하나 그렇다고 나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세상에 ‘빽’ 하나 없이 온전히 자신의 능력만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낙하산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였다. 기준보다 3배나 많이 싣고서도 제대로 결박조차 하지 않은 화물, 과적을 숨기려 4분의 1밖에 채우지 않은 평형수, 무려 20년이 지나 제대로 펴지지도 않은 구명벌,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이 모든 것들을 그대로 눈 감아준 한국해운조합과 한국선급은 해양수산부 퇴직자 낙하산의 소굴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낙하산이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갈 수도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낙하산이 나의 주머니를 위협할 수 있음은 대우조선해양 사태에서 확인됐다. 회사의 돈이 들고 나는 것을 책임지는 최고재무책임자(CFO) 자리는 대주주인 산업은행 퇴직자들이 줄줄이 차지했다. 회사의 경영을 감시해야 할 감사위원과 사외이사 자리도 대부분 곳곳에서 내려온 낙하산들이 꿰찼다. 오죽했으면 “자회사 낙하산의 3분의 1은 청와대, 3분의 1은 금융당국, 그리고 3분의 1은 산은이었다”는 얘기까지 나왔을까. 그들이 끌고 밀어주며 눈 감은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는 5조원대에 달한다. 그렇게 구멍 난 돈을 메우는 데 정부는 국책은행 출자라는 우회적인 통로로 10조원이 넘는 국민들의 혈세를 투입하기로 했다. 여기엔 피땀 흘려 번 돈에 꼬박꼬박 낸 우리의 세금이 들어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도 낙하산에 의해 처참히 짓밟혔다. 국제기구의 임원은 단순히 자리 하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일반인들도 해외에 나가면 없던 애국심이 절로 생겨난다고 한다. 괜히 나라 망신 시키는 것 아닌지, 행동도 더 신경을 쓰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중국이 주도해서 만든 국제기구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 자리의 무게감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정부가 4조원이 넘는 돈을 들여서, 그것도 수개월에 걸쳐 애걸하다시피 해 따낸 자리였다. 정부가 그런 자리에 ‘내리 꽂은’ 사람은 단지 박근혜 대통령과의 친분이 있을 뿐, 국제금융이나 경제외교의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이(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였다. 그가 언론 인터뷰를 통해 폭탄 발언을 쏟아내고는 잠적해버려 국제적인 망신을 톡톡히 산 뒤 부총재 자리 하나를 날려먹는 데는 고작 4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무서운 건, 이런 일련의 학습에도 불구하고 낙하산 시도는 더 노골적으로, 더 집요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우조선해양 사태로 곤욕을 겪은 산업은행이 또 다른 자회사 대우건설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친박 핵심 실세가 밀고 있다는 인사를 앉히려다 여론의 저항에 잠시 인선을 보류한 것만 봐도 그렇다. 제2의 대우조선해양을 만들 거냐는 비판에 귀를 닫고 꼭두각시 노릇을 한 산업은행이나, 낙하산을 막기는커녕 외려 이 낙하산 인사의 선임을 물밑에서 밀었다고 알려진 금융당국이나, 이 판국에 자신의 사람을 어떻게든 내려 보내겠다는 정치권이나 어떻게 한결같이 이렇게 철면피일 수 있는지. 하긴 세월호 참사의 주범이라던 해운조합 이사장 자리를 두고 친박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 내정됐다 뒤엎어지는 일도 있었으니 전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더 단단히 대비를 해야 한다. 정권 말기 막차를 타려는 보은(報恩) 낙하산이 조만간 무더기로 쏟아져 내려올 거라고 한다. 앞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 역시 장차 우리의 목숨을, 재산을, 또 자긍심을 무참히 빼앗고 짓밟을 수 있다. 낙하산, 그들은 어쩌면 잠재적 테러 집단일지도 모른다.
이영태 경제부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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