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올림픽 도전사는 1948년 1월 생모리츠 동계올림픽부터 시작됐다. 내달 개막하는 리우 하계올림픽까지 어느덧 68년의 세월이 흘렀다. 수많은 스타들이 명멸해 갔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 있다. 이들을 ‘올림픽, 그 때 그 사람’시리즈를 통해 조명한다.
‘경기가 끝나고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위대한 레슬러에게 경의를 표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밴텀급에서 금메달을 딴 터키의 무스타파 다기스타니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경기를 이긴 다기스타니가 깍듯하게 경의를 건넨 패자는 바로 ‘한국 레슬링의 대부’ 이상균 전 태릉선수촌장이다.
이상균은 멜버른 올림픽에서 4위를 차지했는데 ‘손가락 없는 레슬러’로 더 화제를 모았다. 이상균의 왼손은 엄지부터 중지까지 손가락 세 개가 없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당시 전투경찰이던 그는 수류탄 폭발사고로 손가락이 날아가 버렸다고 털어놓았다.
레슬링은 상대의 몸을 붙잡고 매트에 눕혀야 하는 종목이다. 악력(손바닥으로 물건을 쥐는 힘)이 경기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이상균은 레슬러로서 ‘자격 미달’인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 없이도 레슬링은 할 수 있다. 마음먹기에 갈린 것이다”는 은사 황병관의 격려로 힘을 냈다. 아예 처음부터 손가락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을 했다. 왼팔로 상대 팔을 끼고 오른팔을 겨드랑이 밑으로 돌려 목을 휘감는 기술을 연마했다. 그는 두 손가락만으로 4회전을 통과해 준결승까지 올랐으나 결승에서 아깝게 패했다. 당시만 해도 4위는 한국 레슬링이 올림픽에서 거둔 최고 성적이었다.
이후 이상균은 후진양성에 전력투구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레슬링 플라이급 은메달을 딴 뒤 이듬 해 한국인 최초로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장창선 등을 길러냈다.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부회장을 지냈고 태릉선수촌장도 지낸 그는 한국체육관의 마지막 관장이기도 하다. 서울 중구 초동에 있던 한국체육관은 태릉선수촌이 만들어지기 전 복싱의 송순천, 레슬링의 장창선, 역도의 김해남과 유인호 등 수많은 체급 경기의 국가대표를 배출한 뜻 깊은 시설이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이상균은 지난 2010년 11월 향년 80세 나이로 별세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남자 63kg급 금메달의 주인공인 김원기 경희대 대학원 체육학 박사는 “이상균 선생님은 암울한 시기에 손가락 없이 불굴의 정신력으로 대한민국 체육의 역사를 바꾼 진정한 레슬러다”고 회고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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