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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사랑이 밥 먹여 주나요

입력
2016.07.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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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댕 지난여름 바닷가에서 만났던 여인….’ 파란 대문 집에서 기타에 맞춘 남자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참을 서서 노래를 들었다. 노래 속의 여인이 되고 싶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백만년 전 열일곱 살 때 일이다. 아마 잠깐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불 켜진 가로등 아래서 선배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동아리 친구들이 화음을 넣으면 함께 불렀다. 선배의 야윈 얼굴을 곁눈질로 보는데 가슴이 콩닥거렸다. 삼천년 전 대학 새내기 때 일이다. 고백도 못 하고 끝난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여자와 헤어지고 남자는 무작정 거리를 헤맸다. 뜨거운 캔커피를 사 마시는데 여자가 왈칵 보고 싶어졌다. 공중전화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캔커피를 전화기 위에 올려놓고 동전을 넣었다. 손가락이 알아서 기억하고 여자의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남자는 말을 못하고 전화기를 귀에 대고만 있다.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남자의 전화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말 없는 전화를 끊지 않는 여자에게 남자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레쓰비의 뜨거움이 그녀에게로 갔다….’ 오백년 전 신참 카피라이터 시절 만들었던 캔커피 TV 광고의 스토리와 카피다.

21세기에 돌아보니 나의 사랑은 하나같이 유치하고 뻔한 신파였다. 숨기고 머뭇거리고 후회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하다못해 내가 만든 광고조차 드라마나 영화처럼 멋진 반전이나 해피엔딩은 없었다. 어쩌면 그 시대의 사랑은 대부분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여) 사랑에 관한 가장 잘못된 오해는 그 어떤 것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현실의 사랑은 취업의 차이 하나에도 휘청휘청거리니까.

(남) 사랑에 관한 잘못된 오해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현실의 문제도 시간이 지나면 아주 작은 추억에 불과하니까….

(여) 사랑만 갖고 사랑이 되니….

(자막) 사랑을 100% 믿으면 바보다.

취업준비생인 ‘인성이의 사랑은 이상’이다. 남자 선배와 웃으며 걷는 회사원인 여자 친구 지현이를 오해하고는 “거짓말하는 것들은 사랑할 자격도 없어”라고 소리 지른다. ‘지현이의 사랑은 현실’이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 준 적도 없고, 자동차로 드라이브 한 번 시켜준 적 없는 인성이에게 ‘정신 똑바로 차려, 사랑이 밥 먹여 줘?’라고 묻는다.

2003년 화제가 되었던 ‘2% 부족할 때’라는 음료 광고 얘기다. 세기가 바뀌어서인지 광고 속의 사랑도 상당히 현실적이다. 심지어 ‘우리는 항상 새로운 사랑과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고 독설을 날린다. 그러나 저런 광고가 나올 때만 해도 여유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사랑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배부른 소리로 여겨진다. 많은 청춘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에서 한발 더 나아가 5포, 7포, N포 세대로 살고 있다.

2017년도 최저임금이 시급 6,470원으로 결정되었다. 이 돈으로는 결혼은 고사하고 데이트도 힘들다. 결혼정보회사가 발표한 20, 30대 커플의 1회 평균 데이트 비용은 5만5,900원, 9시간을 꼬박 일해야 겨우 한 번 데이트를 할 수 있다. 한 시간을 일해도 두 사람이 커피 한 잔씩을 마시기도 불가능한 최저임금을 보면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응답한 미혼 여성이 겨우 7.7%뿐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결과가 놀랍지도 않다.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연애를 포기해야 할까. 최저임금은 젊은이들이 최소한 소박한 데이트 정도는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액수가 되어야 한다. 밥을 먹어야 사랑도 한다, 밥을 먹어야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 사랑이 밥 먹여 주는 것이 아니라,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밥이 사랑을, 아이를, 미래를 낳는다.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동영상] 2% 부족할 때 전지현, 조인성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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