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의문은 이거다. ‘휴가 때 책 가져가긴 할까.’통신기술이 시원찮던 시절에야 하다못해 낯선 여행지에서 반드시 생기고야 마는, ‘어쩌지 못할 시간’에 대비할 필요성이 있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등 온갖 SNS에 사진 올리고 댓글 달고, 블로거 맛집 찾아가기 바쁜 요즘, 그 ‘어쩌지 못할 시간’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걸까.
책 좋아하는 주변 사람이 한마디 거들었다. “아무리 ‘좋아요’ 백 번 눌러주고 이거 재미있다고 주렁주렁 댓글이 달려도 책 사기 위해 자기 지갑에서 돈 꺼내는 그 순간만큼은 책의 소장가치를 냉엄하게 따지는 게 독자에요. 두리뭉실하게 추천하느니, 읽는 사람은 그래도 읽는다는 전제 아래 취향과 타깃을 명확히 해서 추천하는 건 어떨까요?”
그래서 해당 분야에서 대중성과 전문성을 겸비하고 있다고 평가 받는 ‘독수리 5남매’ 사장에게 각 3권씩 추천 받았다. 인문은 1,000여쪽 분량의 벽돌책을 꾸준히, 너무도 꾸준히 내서 ‘일간 글항아리’라 불리는 글항아리 강성민 사장. 역사는 최근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박유하 논쟁 등 역사 관련 이슈에서 빠지지 않는 이름이 된 철의 여인 푸른역사 박혜숙 사장. 문학은 시집을 열심히 만들어내면서 젊은 문인들 사이에서 ‘왕언니’로 통하지만 굳이 스스로를 ‘상궁’이라 낮추는 난다 김민정 사장. 과학은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 서고 있는 동아시아의 한 과학 하는 한성봉 사장. 장르물은 이미 수많은 형제자매님들을 이끌고 장르문학으로 난 비밀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북스피어 김홍민 사장.
벽돌 강성민 사장
예상대로다. 슬쩍 끼워 넣어도 되는데 굳이 “우리 책은 차마 못 넣겠어요”라며 영 엉뚱한(?) 책 3권을 꼽았다. 첫 번째는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의 ‘고전-인간의 계보학’(한길사). “인간 운명에 대한 대답이 문학이라면, 고전은 그 가운데 최고의 대답들이라 할 수 있지요. 다이제스트를 넘어 고전을 깊이 있게 파헤치는, 매력적인 책이에요.” 두 번째 책은 김연철 인제대 교수의 ‘협상의 전략-세계를 바꾼 협상의 힘’(휴머니스트). “민주주의가 ‘차이 속의 공존’이라면 그 핵심은 협상 아닐까요. 통일문제, 국제관계 전문가일 뿐 아니라 엄청난 문필가이기도 한 김 교수님의 멋진 책.” 세 번째 책은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의 ‘눌변-소란한 세상에 어눌한 말 걸기’(문학과지성사). “폭언, 극언, 망언, 실언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어쩌면 내가 괴물이 되어 가는 건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보면서 가다듬을 수 있는 책 같아요.”
역덕 박혜숙 사장
추천 책을 묻자 돌아온 질문이 “몇 매로 답하냐”였다. 칼 같은 질문이다. 몇 매까지는 당연히 필요 없다. 첫 추천 책은 퇴직 언론인 김창희가 우연한 계기에 추적하게 된 집안 내력을 기록한 ‘아버지를 찾아서’(한울). “휴가 땐 가족 공통의 기억을 만들기 위해 사진을 많이들 찍잖아요. 그 사진을 50년 뒤에 우연히 발견한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9살 때 아버지를 잃은 저자가 복원한 3대 가족사가 그 심정의 일단을 드러내준다. 두 번째 책은 님 웨일스의 ‘아리랑’(동녘). “민족과 독립을 떠나서 그냥 조근조근 대화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죽은 김산이 살아있는 내 뺨을 때리는 기분이 든다고 할까요.” 마지막은 박정윤의 소설 ‘나혜석, 운명의 캉캉’(푸른역사). 시대에 앞섰다는 이유로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신여성 나혜석. “역사에 비춰보면 모든 사람의 삶이 절반의 실패요, 절반의 성취라 생각해요. 폭염일수록 불꽃 같은 삶을 마주 대해보면 어떨까요.”
과학 한성봉 사장
한 사장의 선택은 빨랐다. 요청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이미 끝난 듯 했다. 첫 책은 생태학자 데이비드 해스켈의 ‘숲에서 우주를 보다’(에이도스). “1㎥ 넓이의 숲을 1년 동안 관찰하면서 쓴 책이에요. 생물학자가 시인처럼 썼다는 찬사를 받았지요. 피서하러 간 깊은 숲에서 우주를 느끼게 해드릴 겁니다.” 두 번째 책은 젊은 고고생물학자 박진영씨가 쓴 ‘공룡열전’(뿌리와이파리). 공룡이라면 어릴 적 추억으로 남은 게 대부분인데 이 책은 성인들이 군침 흘릴 만한 얘기들을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갑갑한 현실을 벗어나 뭔가 꿈꾸고 싶을 때,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공룡이 뛰놀던 원시세계 아니었던가요. 정신의 피서로는 그만이죠.” 마지막은 1,000만 조회수를 자랑하는 과학 팟캐스트를 책으로 옮긴, 현재 5권까지 나온 시리즈물 ‘과학하고 앉아있네’(동아시아). “바지 뒷주머니에 한 권 척 구겨 넣고 아무데나 앉아서 읽으면 그게 바로 과학하고 앉아있는 거죠.”
야매 김홍민 사장
별호 짓기 쉬웠다. 정식으로 출판 일을 배운 적 없다는 뜻에서 ‘야매’를 공식 별호로 오래 전부터 써왔으니. 처음 고른 책은 스탠리 엘린의 ‘특별요리’(엘릭시르). 여자 출입금지, 메뉴는 정해주는 대로, 입소문 따윈 내지 말 것. 시대의 대세 ‘먹방’에 역행하는 이 레스토랑 규칙을 지켜야 주방장의 특별요리를 먹을 수 있다. 왜냐고? 두그두그둥. 그게 재미다. 두 번째 책은 리처드 매드슨의 ‘줄어드는 남자’(황금가지). “방사능에 노출된 뒤 매일 0.36㎝씩 줄어드는 남자 얘기에요. 미드 ‘환상특급’ 기억하세요? 딱 그 느낌입니다.” 야매 사장이 키높이 신발 애호가란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다. 마지막은 미쓰다 신조의 ‘노조키메’(북로드). “책 앞에 ‘이런 사람 절대 읽지 마세요’란 당부가 있는데 이 말 만으로도 독자를 아노미 상태에 빠뜨리는 책이에요.” 한마디 덧붙였다. “노조키메가 무슨 뜻이냐고요? 으흐흐, 며칠 동안 밤잠 설치고 싶은가 보죠?”
상궁 김민정 사장
파주 김 상궁이라 한껏 낮췄으나 상궁 신분에 비해 고급스럽다. 첫 추천작은 예술가 조 브레이너드가 쓴 독특한 형식의 회고록 ‘나는 기억한다’(모멘토). “‘나’, ‘기억’ 둘의 화합이야 말로 ‘문학’의 전부 아닐까요. 이 책을 35년에 걸쳐 7, 8번 읽었다는 폴 오스터의 말은 괜한 주례사가 아니었어요.” 두 번째 책은 폴란드의 국민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충분하다’(문학과지성사). “‘그 다음으로 좋은 경우는/ 그냥 읽히는 것이지.(…)세 번째 가능성은/ 이제 막 완성되었는데/ 잠시 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이라는 시의 구절에 밑줄이 굵게 가 있다. 참으로 시답고 시집다운 그 정신을 깨우는 알람 같은 시편들.” 마지막은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문학동네). “젊은 데 늙음을 아는 소설, 심장과 근육을 제 기능에 맞게 운동시킬 줄 아는 소설. 소설에서 배려를 배웠다면 그건 마땅히 읽어야 할 소설이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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