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내 친구 M의 이야기이다. 내일은 당신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7월 1일 아침 출근길에 M은 경기 분당구의 지하도 계단을 오르다 성범죄를 당했다. 다리를 누군가 건드리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본 M은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휴대전화로 M의 치마 속을 찍고 있었다. M은 소리를 질렀고 몰카범은 달아났다. 지하도엔 M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M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쥐고 112를 눌러 신고했다. 믿을 건 경찰뿐이었다. 그날 오후 M은 성범죄 피해 신고를 접수하러 A지구대로 갔다. M의 좌절은 이 때부터 시작됐다. ‘고작 치마 속 몰카 찍혔다고 지구대까지 찾아 온 여자’를 경찰들이 귀찮아한다고 M도, 동행한 회사 동료도 느꼈다. M은 한 달 전에도 비슷한 피해를 당했으니 나쁜 놈들을 꼭 잡아 달라고 사정했다.
“지하도의 CCTV 확인할 수 있나요? 범인 잡을 수 있겠죠? 조사 절차는 어떻게 되나요?” M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M에게 다가온 한 경찰은 ‘진술 과정에 이상 없음’이라 쓰고 빨리 돌아가라고 했다. “이상이 많은데 왜 이상이 없다고 쓰나요?” 회사 동료가 항의했다. “당사자도 아닌데 가만히 있어요!” 있는 대로 짜증을 내는 그 경찰 앞에서 M은 얼어붙었다.
M은 나와 다른 친구들이 있는 단체 카톡방에서 하소연했다. M의 사연은 성범죄 피해자를 함부로 대하는 경찰을 고발하는 기사의 소재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경기도의 경찰서들을 담당하는 기자에게 제보했다.
취재가 시작돼서인지, 경찰의 태도가 달라졌다. M은 다음날 ‘B경찰서 여성청소년계에 사건이 접수됐다’는 문자를 두 통이나 받았다. 3일엔 B경찰서 경찰과 함께 몰카 피해 현장을 찾았다. 거미줄에 칭칭 감긴 CCTV 두 대를 가리키며 경찰은 먹통인 것 같다고 했다. 얼마 전 가까운 건물 여자화장실에서도 몰카 피해 신고가 있었다고도 했다. 그런데 왜 아무도 CCTV를 점검하지 않았을까.
낙담한 M에게 경찰은 말했다. “그 친구 또 만나면 조용히 따라가요. 위치 추적이 되는 112와 통화하며 가는 게 안전합니다.” 피해자 앞에서 몰카범을 ‘그 친구’라 부른 건 말버릇 때문이라 쳐도, 몰카범을 따라가 잡으라는 말에 기가 막혔다. 당황한 몰카범이 흉기라도 휘두른다면….
그 뒤로 경찰에선 연락이 없었다. 경찰은 취재를 시도한 기자에겐 여러 번 전화해 봐 달라고 했다. M은 닷새를 기다리다 담당 경찰에게 전화했다. 경찰은 CCTV가 다행히 살아있다며 동영상을 보내 줬다. 지하도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다 나타나 M을 따라가는 몰카범이 그대로 찍혔다. 그가 같은 장소에서 다른 여성을 따라가는 장면도 잡혔다. 인적 드문 그 지하도가 몰카범의 서식지이고, 피해자가 수없이 많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몰카범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는데도, 그가 어느 길로 도망쳤는지를 M이 알려줬는데도, 경찰은 잡기 어렵다고 했다. “그 친구 만나면 112와 통화하면서 따라가요”라는 경찰의 말을 다시 한 번 듣고 M은 차라리 웃어 버렸다.
M이 마주한 건 성범죄 피해자의 고통에 무심한 경찰 조직의 맨얼굴이었다. 몰카범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여성의 치마 속을 찍어 들여다 보며 욕구를 해소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헐값에 팔아 넘긴다.
‘치마 속 사진을 찍히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치마를 입지 않는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치마를 입었다가 몰카범에게 당할 경우엔 전화통화를 하면서 따라가 붙잡아 경찰에 넘기자. 몰카범이 폭력을 쓸지 모르니 전기 충격기도 필요하다. 굳이 경찰에 신고하고 싶다면, 두 번 세 번 좌절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지독한 마음 고생 끝에 M이 내린 결론이다. 그리고 M은 치마를 전부 버렸다.
정치부 최문선 차장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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