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俄館播遷) 120년을 기념해 고종이 피신했던 서울 정동의 ‘구 러시아공사관’과 피난길로 사용됐던 일명 ‘고종의 길’ 복원 사업을 문화재청이 본격 추진한다. 덕수궁을 에워싸고 있는 정동 일대는 구한말 격동기의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는 근대문화유산의 보고다. 서울시도 다양한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정동 일대가 근대사의 자취를 곱씹을 역사문화공간으로 한층 새로워질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재청은 올해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아 1896년 2월 고종이 피신해 약 1년 간 머물렀던 서울 중구 정동의 ‘구 러시아공사관’을 2021년까지, 경복궁에서 거처를 옮길 때 이용했던 ‘고종의 길’을 2017년까지 복원한다고 20일 밝혔다.
사적 제253호로 지정돼 있는 구 러시아공사관은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고종이 피신해 국정 수행 및 대한제국 건설을 구상한 곳이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1890년 세워진 르네상스 양식의 벽돌조 건축물(면적 약 752㎡)로 한국전쟁 당시 대부분 파괴돼 현재는 반원형 창과 박공 형태의 페디먼트(창 또는 출입구의 윗부분 장식)을 지닌 탑 부분만 남아 있다. 이곳은 배치도 및 평면도를 바탕으로 2017년 고증을 거쳐 설계도를 확정한 뒤 정동공원 내에 원형대로 복원될 예정이다.
고종은 이곳에 머물 당시 친위 기병대를 설치하고 지방 제도와 관제를 개정했으며 민영환을 특명전권공사에 임명해 영국ㆍ독일ㆍ러시아 등 각국에 외교 사절로 머물게 했다. 또한 이곳에서 환구와 사직 등에 지내는 제사를 옛 역서(曆書)대로 거행하도록 하는 등 주권 회복에 힘쓴 결과 경운궁 환궁 뒤 환구단 건축 및 환구 의례를 거행한 후 황제로 즉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고종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 이동한 길로 추정되는 ‘고종의 길’은 오는 9월 착공해 내년 중 복원을 목표로 한다. 복원 내용은 미국 대사관저와 덕수궁 선원전 터 사이에 경계벽 담장(길이 113m, 높이 3m)과 석축(길이 50m, 높이 4m)을 세우는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 미국 공사관이 제작한 정동지도는 선원전과 현 미국대사관 사이 작은 길을 ‘왕의 길(King’s Road)’로 표시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또 ‘고종의 길’ 복원을 시작으로 2039년까지 3단계에 걸쳐 덕수궁 복원 정비에 나선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마련한 ‘덕수궁 복원 종합정비 기본계획’에 의거해 진행되는 이 사업에는 모두 560억원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별개로 서울시는 정동 일대 근대 유산 재정비를 위해 국세청 별관 터부터 덕수궁, 옛 러시아 공사관, 정동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2.5㎞에 ‘대한제국의 길’(가칭)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는 이 구간을 ‘외교가’(러시아공사관, 프랑스대사관터, 손탁호텔터 등), ‘옛 궁안길’(고종의 길, 선원전 터 등), ‘신문화의 길’(정동교회, 배재학당 등), ‘배움의 길’(서학당, 성공회, 구세군 등) 등 네 가지 테마로 구성해 교육 및 관광 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일부 구간은 영국대사관 업무 빌딩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영국측과 협의 중에 있다. 지난해 철거된 국세청 별관 터에는 시민마당과 대한제국 역사전시관이 설치되며 선원전 터도 원형대로 복원한다.
하지만 이 같은 근대 유산 원형 복원 추세와 달리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맞은 편의 옛 대관정(大觀亭) 터에는 호텔 개발이 추진 중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대관정 터는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선포 이듬해 매입해 영빈관으로 사용하다가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일본군사령부로 바뀌었고, 을사늑약 직후에는 일본군이 이곳에서 대한제국 대신들을 겁박하는 등 근대사의 상흔이 서린 곳이다.
서울시와 중구는 지난해 말 대관정 터 일대의 1930~60년대 근대건축물을 헐고 27층 높이의 호텔을 짓는다는 부영그룹의 계획을 통과시켰다. 부영은 당시 대관정 유적을 호텔 내 2층에 전시관을 만들어 옮겨놓는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후 비판 여론이 일어 현재 진행 중인 서울시 건축 심의 과정에서 이 계획이 어떻게 바뀔지 주목된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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