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회토의 척박한 땅 제주에서도 논농사가 가능할까? 제주의 농경지는 대부분 감귤과수원과 밭으로, 벼농사를 하는 모습을 찾아 보기가 힘들다. 간혹 밭벼인 산디(산도,山稻)를 재배하는 곳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제주도에도 엄연히 논이 있고 벼농사를 짓고 있다. 서귀포시 하논이나 한경면 용수리 등지에 가면 논농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쌀이 귀한 시절 제주에서는 쌀밥을 ‘곤밥’이라 불렀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주식은 보리밥이었기에 쌀로 지은 밥을 고운 밥, 즉 곤밥이라 불렀던 것이다. 당시 곤밥은 명절이나 제사 때에만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제주에 전해오는 옛말 중에 일강정, 이번내, 삼도원이라는 표현이 있다. 첫째가 서귀포시 강정마을, 둘째가 안덕면 화순리(번내), 셋째가 대정읍 신도리(도원)라는 말이다. 논농사 지역으로 쌀밥을 흔하게 먹을 수 있는, 다시 말해 제주에서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표현이다.
제주에서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건 엄청난 혜택이다. 물이 귀한 일부 지역에서는 물을 끌어다 논농사를 짓기도 했다. 제주의 3대 수로 개척 역사로 꼽히는 안덕면 화순리, 중문 베릿내(星川), 애월읍 광령리가 대표적이다.
화순리의 경우 지형이 평평하지 못하고 굴곡이 심하며 곳곳에 동산이 있어 농사짓기에 불편한 조건이지만, 사시사철 흐르는 황개천의 물을 굴착수로를 통해 밭까지 끌어와 5만여 평의 농경지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김광종이라는 개척자가 있었다. 김광종은 1832년 3월부터 1841년 9월까지 10여 년에 걸쳐 황개천 바위를 뚫어 화순마을의 넓은 들에 물을 끌어오는 수로를 개척했다. 사재를 털어 인력과 자재를 대고 물길을 낸 사업을 제주에서는 중국 한(漢)나라의 태수 소신신(召信臣)의 선정에 버금가는 일로 평가한다. 제주향교지는 김광종을 ‘바위를 뚫어 최초로 농업용수를 개발한 관개농업의 개척자’라고 평가하면서, ‘10년 만에 1,100m의 용수로 완공과 더불어 5만평을 개답(開畓)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훗날 화순리 사람들은 그를 전조(田祖)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한편, 혜택을 받은 농지 주인들은 화순답주회(和順畓主會)를 조직해 영세불망비를 세우기도 했다.
중문마을의 경우 구한말 대정군수를 지낸 채구석이 나서서 수로를 개척했다. 천제연폭포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수로를 통해 끌어들인 후 베릿내오름 앞의 논에 물을 댄 것이다. 이 공사에는 채구석을 비롯해 이재하, 이태옥 등이 중심이 되어 중문, 창천, 감산, 대포리 지역 주민들이 동원됐다. 1차 공사는 1905년에 착공, 1908년에 완공해 5만여 평의 논을 확보했고, 2차 공사는 1917년부터 1923년까지 시행해 다시 2만여 평의 논밭을 개척했다. 천제연 관개수로는 완공 후 ‘성천답회’에서 관리해 오다가 1957년 국유화돼 현재는 서귀포시 상수도과에서 관리하고 있다. 2005년 4월 등록문화재 제156호로 지정됐는데, 천제연폭포 내려가는 길에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광령리는 김부영이라는 이가 1885년 무렵 방축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 너븐절 지경에서 논농사를 지은 것이 시초다. 뒤이어 한라산 어리목 수원을 광령계곡으로 끌어와 물을 저장하는 과정에서 하천이 범람, 방축이 무너져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1930년 무렵 백창유가 어리목에서 너븐절에 이르는 구간에 시멘트 수로를 개설해 본격적인 논농사가 가능하게 됐다. 이후 1950년대 말에 본격적으로 어승생 수리사업이 재개돼 광령과 외도동 일대까지 논밭을 조성해 10여 년 간 논농사가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어승생에 한밝저수지를 축조한 이후 농업용수가 아닌 제주시민의 식수원으로 활용하면서 논농사는 사양길에 접어들고 말았다.
광령리는 물이 귀한 제주에서 그것도 해안마을이 아닌 중산간 일대에서 논농사를 했던 극히 예외적인 사례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그 과정에 수많은 선각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제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강정효 (사)제주민예총 이사장 hallasan19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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