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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목소리처럼 들리던 몸짓들

입력
2016.07.1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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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대하철이었다. 대하 산지와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는 나에게 친구 둘이 찾아왔다. 서울 집에서도 오분 거리에 사는 친구들이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아마 나보다는 대하를 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바닷가에서 대하를 구워 소주를 먹는 일 말고는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우리는 늦은 밤 어두운 지방 국도를 타고 요란하게 대하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을 지나 대하 산지로 유명한 항구에 닿아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단골집에 자리를 잡았다. 영업시간이 끝나가는 식당의 바다 쪽 통유리는 캄캄했고 축제 끝물의 사람들은 전부 빠져나가 식당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두 줄로 나란히 배치된 테이블 끄트머리 안쪽에 친구 둘이 앉고 나는 벽을 보고 앉아 늘 하던 이야기와 함께 대하를 구워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영업시간이 끝날 무렵 입구 쪽으로부터 한 무리의 사내들이 들어왔다. 그쪽도 단골인 듯 이런 저런 말없이 불쑥 들어와 내 뒤편에 곧바로 자리를 잡았다. 10여명 되는 사람들이 차곡차곡 앉았고 주인 아주머니는 별다른 말 없이 그들에게도 대하를 구워 주었다. 나는 그들을 설핏 돌아보고는 다시 친구들과 이야기에 열중해 소주를 마셨다. 신선한 해산물과 먹는 찬 소주는 언제나 달콤했고 입에 붙는 소주만큼이나 취해가는 친구들은 편안했다. 우리는 이미 너무 어두워져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해변가 테이블에 앉아서 멀리 떠나온 곳 특유의 청량함과 취기의 아늑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밤은 깊어 갔다. 나는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에 열중했다가 다시 친구들의 역설을 듣는 것에 집중해가면서 무르익는 분위기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넓은 공간인데 아무도 말하지 않아 정적이 흐르는 찰나. 일순간 그 정적이 지나가고 취해가던 나는 갑자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뒤 테이블에 사내들이 들어온 지 한참 지났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말소리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널찍한 공간에서 떠들어 대던 것은 그때까지 취한 우리뿐이었다.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휙 하고 돌렸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바로 농아들의 회식자리였다. 한데 그런 장면은 도무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열명 남짓한 사내들은 소주를 마시며 각자 수화로만 회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 광경은 입으로만 떠드는 내 눈에는 너무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수화인지 익살을 떠는 몸짓인지 구분하지 못할 취기 어린 동작으로 다수에게 이야기를 하는 재담꾼이 있고, 분명 웃음을 표시하는 뜻일 수화를 동시에 표현하는 재담꾼의 청자들이 있었으며, 그늘진 구석자리에 서로의 눈과 소주잔을 노려보며 진지한 몸짓으로 대화하는 진중한 술꾼도 있었고, 테이블 중간쯤 가벼운 미소와 크지 않은 동작으로 서로의 사담을 나누는 사람과, 구석 자리에서 못 들은 척하고 대하를 구워 먹는 사람에, 종국에는 쓰러져 자는 사람까지도 있었다. 온 세상이 일시적으로 음소거가 된 것처럼 입으로 하는 말만 빼고 행동으로 말하는 인간들의 회식자리가 고스란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 조용하나 성대한 자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는 진귀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내가 살아온 세상과 상식을 뛰어넘는 무엇인가에 초연하고 또 초탈한 광경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 뒤편을 흘깃거리느라 남은 술자리를 보내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에 돌아왔다. 물론 그리곤 다시 거한 술판이 벌어졌지만 그날 내가 기억하는 것은 늘 했던 이야기도 떠나온 곳 특유의 청량함이나 취기의 아늑함도 아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그 처연한 듯하면서도 신비롭게 동시에 펼쳐지던 수십 개의 몸짓들 외에는 도무지 떠오르지도 그리고 그것들 외에는 그 날을 설명할 길도 없어지곤 했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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