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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료만 20억씩 먹는다는… 기상청 슈퍼컴퓨터를 믿는 게 아니었다

입력
2016.07.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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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전화 몇번을 들어봐도

오후부터 많은 비가 내린다고

“쩌그 노고단에 구름이 없는디…”

어르신들 말씀이 들어 맞았다

대형 마트에서 진행하는 황금 20돈 경품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이 추첨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구례에 이렇게 많은 사람 모인 건 처음"이라고 하나같이 신기해 했다.
대형 마트에서 진행하는 황금 20돈 경품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이 추첨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구례에 이렇게 많은 사람 모인 건 처음"이라고 하나같이 신기해 했다.

몸은 이미 비 올 것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화 ‘131’을 눌러 몇 번을 들어봐도 구례지역엔 오후부터 많은 비가 내린다고, 전화기 속 아줌마가 체온 없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마을회관에서 농번기 점심 급식을 받아먹으며 들은 어르신들의 대화에도 비 얘기가 들어 있기는 했다. “쩌그 노고단에서 구름이 와야 비가 오는 건디 반대로 바람이 부니 모르겄구마.” 전기요금만 20억원씩 먹는다는 기상청 슈퍼컴퓨터보다 매 끼니 소박하게 드시는 어르신들의 말씀이 평소에는 더 믿을 만 한 편인데, 이번엔 기계를 믿고 싶었다. 괜히 20억씩 먹겠나. 몸뚱이는 마음 따라 쉬어야겠다며 흐물거리고 있었다.

허나 비는 오지 않았다. 하늘을 바라봤지만 구름의 밀도는 옅어져 갔다. 기상청 아줌마 말이 틀렸다. 사람이건 기계건 말은 함부로 믿는 게 아니었다. 팽나무 아래서 잡담 나누며 함께 비를 기다리던 이장은 감 밭 풀이나 베야겠다며 트럭에 올라탔다. 쓰레기봉투 앞에서 꽁초를 비벼 끈 형님도 담배 사러 간다며 오토바이 타고 떠났다. 떠나는 뒷모습들이 야속했다. 동시에 머릿속에선 ‘비 올 게 분명하니 그냥 편히 쉬자’는 검은 생각과 ‘비 오기 전까지는 풀이라도 뜯어야지’ 하는 하얀 생각이 기상청 컴퓨터만큼이나 빠르게 오갔다.

몸은 하얀색을 싫어했다. 몸을 이해하기로 했다. 몸이 준비되려면 어느 정도의 워밍업이 필요한 법이다. 며칠 전에도, 제육볶음 먹으러 가자며 나섰던 아내가 식당에 도착해서 갑자기 낙지볶음으로 메뉴를 바꾸자, 돼지고기에 최적화 됐던 뱃속은 반 공기를 먹도록 낙지를 돼지로 알았는지 살짝 뒤틀렸다. ‘오후에는 쉬게 될 거야’ 하며 휴식을 준비했던 몸이 갑자기 풀 뜯자는 소리에 어찌 고분고분 하겠나. 비가 오고 있다는 최면을 걸고 비를 기다리기로 했다.

몸이 준비 안 됐는데 그냥 쉬자

‘매실농가 비상총회’ 읍으로

가게 앞에 주차하다 뒷차 흔들

으이구 풀이나 벨 걸 오지랖은…

꼭 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매실농가 비상총회’가 열린다고 했다. 매실 열 댓 그루, 그 중 열 그루는 묘목이나 마찬가지인 보유 현황을 갖고서 매실 농가라고 하기는 뭐 하지만 몇 백 주씩 키워 온 진정한 ‘매실인’들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매실가격 폭락에 대한 여러 가지 목소리가 나올 터였다. 킬로그램당 4,000원 하던 매실이 400원에도 거래됐다고 들었다. 마침 비도 온다고 해서 ‘거기나 가봐야지’ 했던 것인데, 멀쩡히 퍼런 하늘 이고서 읍으로 향했다.

모종 포트를 구입하기 위해 농자재 가게를 먼저 들르기로 했다. 물건 사는 것도 일이라며 나를 달래고 싶었다. 가게 앞에 세워져 있는 승용차 앞으로 트럭을 끼우는데 뒤가 약간 흔들 했다. 혹시나 해서 내려보니 앞 승용차 운전석 쪽 범퍼 모서리에 줄 서너 개가 40~50센티미터 정도 그어져 있었다. 짧은 순간 별 생각이 다 지나갔다. ‘으이구, 너두 농장 풀이나 벨 일이지 뭔 오지랖으로 읍에는 나와 갖구’ 하는 타박도 있었고, ‘본 사람 없는 듯 하니 얼른 튀어’ 라는 명령문도 있었다.

일단 가게에 들어가 차주가 있나 알아보니 없었다. 운전석 앞에 전화번호가 있어 누르면서도 ‘성질 더러운 사람 만나면 골치 아플텐데’ 하는 걱정이 앞섰다. 전화번호를 거의 다 눌러가는데 아는 형님의 이름이 계속 화면에 남아 있었다. 끝내 이름은 없어지지 않았고 상대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동생이 워쩐 일인가” 다행이라는 심정도 있었지만 너무나 반가워하는 맑은 음색에 미안한 마음이 훨씬 커졌다. “형님, 차 있는 데로 잠깐 오실래요?”

형수님이 미장원에 올 일이 있어 같이 나오셨단다. 범퍼를 가리키며 내가 한 짓이라고 했더니 형님은 급박한 어조로 말했다. “알았어. 집 사람 나올 때 됐으니 일단 얼른 가!” 말씀이라도 고맙다고 하던 차에 한 여자 분이 다가와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내가 뭐 어쨌는데요?” 형님은 사색이 됐고 나는 이실직고 할 수 밖에 없었다. 혈색을 찾은 형님은 “여편네 왜 이렇게 일찍 나왔냐”고 소리를 치며 내 등을 밀었고, 형수님은 범퍼를 쓰다듬으며 “아, 말이 좀 그러네요” 반격했다. 일단 사건이 벌어질지도 모를 사고 현장을 벗어났다. 그날 밤 대판 부부싸움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형님 모르게 조용히 보험처리를 접수시켰다.

뒤늦게 도착한 비상총회는 막바지였다. 선출직 공무원들이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발언을 마치면서 총회도 끝났다. 나오는 사람 중에 아는 얼굴이 있어 “뭔 얘기 좀 나왔어요?” 물으니 그 형님 말씀도 “높은 사람덜 말만 많았지 암것두 없어”로 끝났다. 하긴, 30분만에 끝난 모임에서 뭔 뾰족한 수가 나왔겠나 싶었다.

매실농가 비상총회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행사장을 나서고 있다.
매실농가 비상총회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행사장을 나서고 있다.

별 수 없이 싫다는 몸을 달래며 농장으로 갔다. 다음날 하려고 생각했던 밭갈이를 준비했다. 들깨 모종을 옮기기 위한 밭이다. 저번 달에 줄로 심었던 들깨밭은 명아주와 바래기만 가득했다. 확 갈아 엎을 거다. 장씨아저씨 밭에서 경운기를 옮겨 오고 시동을 걸었다. 해도 저물고 구름도 끼면서 일하기 딱 좋은 선선한 날씨였다. ‘그래, 진작 로타리나 칠 걸’ 생각하면서 시동을 걸었다. 문제는 들깨 모종이었다. 모종으로 옮길 생각이었으면 밭 한 켠에 들깨를 뿌리고 관리를 했어야 하는데, 예쁘게 줄 따라 올라올 꿈만 꾸다가 모종 준비는 하지도 못했다.

날은 더 시원해졌고 어두워졌다. 25미터 길이를 두 번쯤 왕복했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맞으면서 하겠는데 빗방울이 감자만했다. 잠깐 맞았는데도 쫄딱 젖었다. 마치 긴 시간 일한 사람의 몰골이었다.

고구마밭에서 잡초와 고구마 잎이 자리 다툼을 하고 있다. 다행이 빈자리를 선점한 고구마가 이기는 형세이다.
고구마밭에서 잡초와 고구마 잎이 자리 다툼을 하고 있다. 다행이 빈자리를 선점한 고구마가 이기는 형세이다.

누가 보면 일 많이 해서 힘든 듯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피곤한 듯 씻고 먹고 누웠다. TV를켜니 뉴스 앵커와 기자는 연신 개랑 돼지를 들먹였다. 다가오는 초복(初伏) 때문은 아니었다. 국민의 교육을 기획하는 사람이 국민을 가축으로 표현했단다.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했단다. 영화 대사에서 가져온 말이라고 했다. 99%가 ‘모히또와 몰디브’에 꽂혔을 때 그 사람은 ‘개 돼지’를 캐치했으니 듣고 싶은 것만 들리는 모양이다. 교육부는 국가공무원법상 품위유지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파면을 추진한다고 했다. 정말? 지켜야 할 품위가 있어서? 난 좀 엉뚱한 의심이 든다.

고시를 패스하고 25년 동안 교육부와 청와대를 오간 사람이다. 교육정책의 책임자이고 누구 앞에서 말 조심할 사람이 아니다. 때문에 기자가 녹음기를 켜 놔도 그렇게 얘기했을 거다. 같은 술자리에 있던 교육부 관계자들도 그 사람을 말리지 않고 기자들을 말렸다고 했다. ‘아차!’ 싶었을지 모른다. 지들끼리는 맨날 하는 얘기인데 생각이 많이 다른 신문사의 기자에게 흘렸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의 그러한 생각 덕에 지금 그 자리까지 갔는지도 모른다. 즉, 그의 생각은 그만의 생각이 아니라 본인이 1%에 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교육을 책임지는 윗사람들의 생각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그 자의 징계 이유는 품위 어쩌구가 아니라 ‘국가기밀누설죄’가 아닐까. 아니라면 그의 발언으로 국가?안전을 위태롭게 했고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침해했으므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하는 것이 마땅할 듯 한데…

대형 마트에서 진행하는 황금 20돈 경품행사에 참가한 평범한 구례 사람들이 추첨을 기다리고 있다.
대형 마트에서 진행하는 황금 20돈 경품행사에 참가한 평범한 구례 사람들이 추첨을 기다리고 있다.

“들깨 모종 안 필요한가요?”

군청에서 메시지 돌렸는지

여기저기서 갖다 쓰라는 말씀

모욕은 잊고 “감쏴합니다!”

어쩌다 잠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4시 반에 일어나 서둘러 옷을 입었다. 마을 공동제사 준비로 공동작업이 있었다. 안방을 나오니 선재가 식탁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시험 기간이라며 일찍 잠들더니 긴장은 됐나 보다. 아이의 미래가 ‘개 돼지’ 손에 달렸나 하는 몹쓸 생각을 하면서 집을 나섰다.

공동 작업 때마다 “아침 묵고 천천히 오소”라는 애매한 시간 공지에 항상 꼴찌로 나타났는데 오늘만큼은 ‘탑 파이브’ 안에 들 자신이 있었다. 이장이 마을 방송을 5시에 한다고 했으니 5시에 회관 앞에 서 있으면 거의 1착이 분명했다. 방송하는 시간에 나와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런데 10여명이 나와 있었다. 휴대폰을 열어 보니 5시 3분이었고, 이장은 벌써 방송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이장을 보니 씩 웃으며 한 마디 한다. “빨리 빨리 안 나와! 으르신들이 예초기 돌려야겄어?” 그 어르신들이 웃었다. 영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조폭들이 설치는 내용인데 걸맞지 않게 제목은 ‘달콤한 인생’이었다. 어쩌면 실제로 깡패들의 행복지수가 개 돼지보다 높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거기서 두목이 부하 깡패를 죽이려는 이유로 이렇게 말했다.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엊저녁 뉴스에 이어 잠깐의 시차를 두고 그렇게 연타로 모욕을 당했다. 그렇다고 살의를 느끼지는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 나도 ‘1%’들처럼 영화대사가 생각난 게 대견했고, 이장의 모욕은 담배 한 대로 날아갈 것 같아 가벼웠다.

마을 공동행사를 위해 청소를 마친 주민들이 회관 앞으로 모이고 있다. 청소를 마친 시간이 오전 6시10분 밖에 안된다.
마을 공동행사를 위해 청소를 마친 주민들이 회관 앞으로 모이고 있다. 청소를 마친 시간이 오전 6시10분 밖에 안된다.

청소 마치고 회관에서 돼지고기 찌개로 배 채우고 나니 7시가 조금 넘었다. 신을 신는데 오봉댁어머니가 나오셨다. “원샌 들깨 모종 필요 안한가요?” “예, 필요해요. 어떻게 아셨어요?” 어머니는 내 맘 보다 더 반가운 표정이다. “많지는 않은디 가져가씨요이.” 운동화 끌며 나오는데 운동기구에 걸터앉아 담배 피던 이장도 거든다. “들깨 아직 못 옮겼담서. 우리꺼 많이 있응게 가주가. 대보름 불 놓는 자리 알지?” 허 참, 갑자기 골라서 심게 생겼다.

농장에 와서 갈아 놨던 밭을 보니 잠깐 비에도 흙이 쓸려 내려왔다. 젖을 대로 젖었으니 바로 갈 수도 없다. 사나흘 기다렸다가 다시 갈아야 한다. 고추밭 고랑이나 매야겠다 싶어 호미에 낫에 들고 농막을 나오는데 장씨아저씨 차가 마을에서 내려왔다. “허리 좀 괜찮으세요?” 달려가 여쭈니 반은 찡그리고 반은 웃으시는 모습이 아수라백작이다. “들깨 옮겼는가?” 오늘따라 들깨 풍년이다. “아뇨. 아저씨 경운기 가져와서 어제 갈다가 비만 맞았어요.” 아저씨가 하실 말씀을 변하는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하는거이 맨날 그렇지 뭐. 밭에 있는 들깨 다 남는 거니까 갖다 심어.” 신기했다. 군청에서 원유헌 들깨 필요하다고 메시지라도 돌렸나? “근데 들깨 필요한지 어떻게 아셨대요?” 아저씨는 차를 출발시키면서 말씀하셨다. “뭘 꼭 말해야 아는가? 들깨 옮길 줄이나 아나 몰르겄어.”

모욕에도 맷집이 생기나 보다. 아무 생각 없이 들깨 주신다니까 좋~단다. “감쏴합니다! 복날 탕 한 그릇 하시죠~”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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