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이창실 옮김
문학동네 발행·144쪽·1만2,000원
‘육체는 슬프다, 아아, 나는 모든 책을 읽어버렸다’고 말라르메가 권태에 젖어 한탄한 한 세기 후, 체코 소설가 보후밀 흐라발(1914-1997)은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기 위해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자신을 은닉한 늙은 폐지 압축공을 만들어낸다. 천장 뚜껑이 열리면 수백 권의 책들이 햇빛과 함께 우르르 쏟아져 내리는 지하 작업실. 바퀴벌레와 쥐떼가 들끓는 이 더럽고 어두운 곳에서 일평생 폐지를 압축해온 독거노인 한탸는 그러나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라고 말한다.
버려진 책들을 폐지로 압축하다가 우연히 지식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 이 하류층 육체 노동자는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 순간을 살아”오며 “뜻하지 않게 현자”가 된 인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 홀로 살아가며 책을 파쇄하는 그에게 노동생산성 같은 건 당연히 기대하기 힘들다.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보후밀 흐라발은 쿤데라가 공산주의 정권의 탄압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던 것과 달리, 자신을 책을 생의 거의 마지막 시기까지 금서로 지정했던 고국을 떠나지 않았다. 프라하 카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창고업자, 전신기사, 철도원, 폐지인부 등 육체노동을 전전하며 살았다. 130쪽에 불과한 짧은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자신의 삶을 그대로 투영해 책에 바치는 경이롭고 아름다운 오마주다. 헤겔과 칸트와 노자와 예수의 책을, 괴테와 실러와 노바리스의 문학을 읽으며 돈도 사랑도 명예도 없는 한탸는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신기해 하며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의 고독이 평화롭고 목가적인 것은 아니다. 나치 침공으로 순식간에 금서가 된 아름다운 책과, 파멸의 운명으로부터 그 책들을 구하려는 은밀한 조력자들. 종전으로 시대가 바뀌면서는 “히틀러와 그의 수행원들이 내 압축통 속에서 사라지도록 파쇄하고 짓이기”지만, 대형 압축기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안 그래도 지식을 음미하느라 생산성 낮은 그의 일자리는 이제 곧 사라질 참이다.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우리가 종이 더미에서 구해낸 장서들도 모두 끝장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더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밝혀내자 대거 자살을 감행한 그 모든 수도사들처럼” 이 슬프고 외로운 노인은 글자의 세계로부터 추방되기보다 글자와 함께 사라지는 편을 선택한다. 축어적으로 책과 ‘나’가 한 몸이 되는 방법을 구현하는 소설의 마지막은 기괴하지만 아름답다. ‘체코의 슬픈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온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고 말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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