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들은 사랑에 서툴렀다. 그래서 마음을 고백하는 방식도 거칠었다. 상대를 대뜸 벽으로 몰아붙인 뒤 “사랑? 웃기지마. 이젠 돈으로 사겠어.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니?”(2000년 KBS2 ‘가을동화’ 원빈)라며 상대의 마음을 강요했다. 요즘 시대였다면 ‘데이트 폭력’으로 지적 받았을 만한 장면이다.
요즘 방영 중인 드라마의 남자주인공들은 과거와는 다르다. 마음을 감추는 법이 없을뿐더러 고백의 언어도 한층 세련돼졌다. “결혼했니? (아뇨) 애인 있니? (아뇨) 됐다 그럼”(SBS ‘닥터스’ 김래원). 갑작스러운 고백에 여자가 당황할 때는 장난스럽게 “나쁜 기지배”라고 타박하며 긴장을 풀어주는 센스도 지녔다. 이 몇 마디 말에 안방극장 여심은 금세 녹아 내렸고, 이 남자의 사랑법에는 ‘직진 로맨스’라는 수식어가 달렸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남성상의 등장이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그대
여성시청자들의 판타지를 대변하는 로맨스드라마의 남자캐릭터는 시대상에 따라 조금씩 변해왔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백마 탄 왕자님’이 한때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MBC·1994)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차인표가 대표적인 예다. 차인표가 연기한 강풍호는 잘 생긴 얼굴과 근육질 몸매, 다정다감한 성격, 지적인 이미지까지 모든 걸 다 갖춘 남자다. 취미는 색소폰 연주. 가끔씩 오토바이를 즐기는 낭만파이기도 하다. 백화점 경영실장인 그는 가난한 형편에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판매사원 여자(신애라)와 사랑에 빠진다. 이렇게 완벽한 남자가 적당한 반항기까지 있으면 한층 더 멋있어진다. ‘별은 내 가슴에’(MBC·1997)의 톱스타 강민(안재욱)은 언제나 제멋대로지만 고아 출신 디자이너 지망생 이연이(최진실)에게만 다정하다. 눈을 반쯤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우수에 찬 눈빛을 빛낼 때마다 여성시청자들이 자지러졌다. 강민은 연이가 곤경에 처하면 언제든 달려와 그를 지키고, 두 사람은 온갖 방해 공작 속에도 사랑을 이룬다. 시청률 50%에 육박한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안재욱은 실제 가수로 데뷔했고, 중국에서 한류스타로 떠올랐다.
2000년대 이전의 인기 남자캐릭터가 하늘 높이 성층권에 존재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대류권으로 조금 내려온다. 직업 면에서도 천편일률적이었던 재벌 3세나 그룹 실장님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요식업계 오너가 새롭게 등장한다. ‘내 이름은 김삼순’(MBC·2005)의 현진헌(현빈)은 레스토랑 사장, ‘커피프린스 1호점’(MBC·2007)의 최한결(공유)은 커피숍 사장이었다. 두 남자캐릭터는 첫 사랑의 상처로 인해 다른 여자들에게 까칠하게 군다. 그러던 중 자꾸만 신경이 쓰이게 만드는 여자 김삼순(김선아)과 고은찬(윤은혜)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여자캐릭터는 여전히 씩씩한 캔디형에 가깝지만 파티셰인 김삼순처럼 전문직을 갖고 있고 좀 더 주체적이다. 남자들도 그런 당당함에 끌린다.
2010년대로 넘어오면 더 현실에 발붙인 남자캐릭터가 등장한다. 어딘가 존재할 것만 같은 남자가 평범한 일상의 언어로 여자에게 구애를 한다. ‘태양의 후예’(KBS2)의 유시진 대위(송중기)는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라며 저돌적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또 오해영’(tvN)의 박도경(에릭)은 “와줘” “보고싶어” “(선물을 하며) 원래 있던 거야” 같은 짧은 말로 여심을 들썩이게 했다. 박도경의 직업은 시놉시스 단계에선 성형외과의사였지만 대본에서 음향기사로 바뀌었고, ‘닥터스’의 홍지홍(김래원)은 고등학교 생물교사로 재직하다 다시 의사로 돌아가는 설정이다. 유시진은 테러에도 살아남는 불사조 군인이긴 하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은 결코 아니다. 현실에 존재할 법한 직업이고, 드라마 안에서 이들의 재력이 크게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드라마 홍보사의 한 관계자는 “인기 남자캐릭터가 이상형에서 공감형으로 변화해 왔다”며 “최근에는 시청자들이 자신을 이입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현실로맨스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드라마 ‘미생’과 ‘직장의 신’ 같은 현실 공감 코드의 드라마가 호평받은 이후 로맨스드라마에서도 판타지보다는 공감이 더 중요해졌다”고 덧붙였다.
신분상승 판타지의 몰락?
과거처럼 사랑도 돈으로 사겠다는 오만한 재벌남이 요즘 드라마에 등장한다면 단박에 ‘막장’ 소리를 듣게 된다. 남자의 재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여심이 흔들리던 시대는 지났다. 드라마가 현실의 반영이듯 캐릭터에도 시청자들의 취향 변화가 반영된다. 남자캐릭터가 현실적으로 변해온 배경에는 로맨스드라마의 주시청층인 여성들의 인식 변화가 있다.
드라마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과거엔 신데렐라 스토리가 실제론 불가능해도 꿈꿔볼 수는 있는 분위기였지만 이젠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맡길 수 없다는 여성들의 사회적 각성이 반영돼 여성캐릭터가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변했다”며 “남성캐릭터도 주변 가까운 곳에 존재할 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고도 분석했다.
한 드라마 PD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당연시되고 사회적 지위도 올라가면서 신분상승 코드는 이제 여성의 판타지를 자극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그는 “여성시청자들의 요구를 반영해 드라마의 남자캐릭터를 자상하고 유머러스하고 말이 통하는 전문직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제력에 대한 판타지는 남자캐릭터의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능력으로 대체되고 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SBS·2014)에서 남자주인공 도민준(김수현)은 외계인으로 설정됐고, ‘시크릿 가든’(SBS·2010)의 김주원(현빈)은 여주인공 길라임(하지원)과 영혼이 바뀌곤 한다. ‘또 오해영’의 에릭도 미래를 보는 초능력을 갖고 있다. 윤석진 교수는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변했지만 그럼에도 힘겨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여전히 갈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적인 남성상을 드라마에 배치하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남자캐릭터에 현실감이 많이 부여됐지만 여전히 한계는 있다. 드라마는 결국 판타지이기 때문에 극사실주의적 캐릭터는 로맨스에 등장하기 어렵다. 또 다른 드라마 PD는 “드라마의 주요 시청층인 20~40대는 대중문화계에서 구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에서 재벌 캐릭터를 필요로 하진 않지만 가난한 남자를 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고 짚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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