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7월 12일
2차대전 소련 붉은 군대의 약 8%(100만 명)는 여군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다른 연합군과 달리 후방 지원병과가 아닌 보병 등 전투병으로 전선에 투입됐다. 여군 저격수만 2,000여 명에 달했고, 나치 병사 1만1,280명을 저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루드밀라 파블리첸코(Lyudmila Pavlichenko)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키에프대학 역사학도 파블리첸코는 1941년 독일군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보병으로 자원 입대, 소련군 25사단에 배속돼 저격 훈련을 받았다. 입대 전 그는 키에프 사격클럽 회원으로 총을 다룬 이력이 있었다. 그는 3.5배율 조준경을 장착한 토카레브 SVT-40 반자동 소총으로 오데사 전투에 투입돼 약 두 달 반 동안 무려 187명을 사살한 뒤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전투에 가담했다.
저격병은 전투에서 적의 핵심 화력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아군을 적 저격병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맡는다. 42년 6월 박격포에 부상을 당해 전선을 떠날 때까지 그는 소련군 공식 집계로 309명을 저격했고, 그 중 36명이 적의 저격병이었다. 그는 ‘죽음의 숙녀 Lady Death’라 불렸지만, 뭇 아군의 생명을 지킨 구원의 천사이기도 했다.
전시 연합군은 전쟁 영웅들을 대중 앞에 세워 사기를 돋우고 참전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기곤 했다. 국제적 영웅이던 파블리첸코는 캐나다와 미국 영국 등지에 초대받아 대중 강연 등을 했고, 백악관에 초대받아 루스벨트와 그의 부인을 예방하기도 했다. 워싱턴D,C에서 한 기자가 그의 스커트 길이를 문제 삼으며 “미국 여성들은 더 짧은 스커트를 입는데 당신 스커트는 너무 길어 뚱뚱해 보인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시카고 연설에서 그는 저 ‘희롱’에 반박하듯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25살인 저는 지금까지 309명의 파시스트 군인을 사살했습니다. 당신들은 저의 등 뒤에 너무 오래 숨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파블리첸코는 43년 소련 영웅금성훈장을 탔고 소령 예편 전까지 저격 교관으로 복무했다. 종전 후 학위를 받은 뒤로는 사학자로 일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세르게이 모크리츠키 감독의 영화 ‘1941: 세바스토폴 상륙작전’이 지난해 개봉됐다. 1916년 7월 12일 태어나 74년 10월 10일 별세했다. 향년 58세.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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