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던 친구. 사소한 오해가 있었다. 서먹서먹해졌다. 그 친구가 나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동안 잘해준 건 다 어디로 가고. 조금 섭섭한 일 있었다고 나를 욕한다는 게 말이 돼?’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말이 있다. ‘백번 잘해줘도 한 번 안 좋았던 상황을 기억하는 게 사람이다.’ 야속하고 섭섭한 일이다. 상대방 인성이 썩 좋지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은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지도록 진화해 왔다고 한다. 위험하고 불쾌한 기억들은 뇌의 변연계(Limbic System)를 자극해서 기록으로 남게 되는데, 이 기록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존재하기에 미래의 또 다른 위험 상황을 신속하게 대처하게 해 준다.
실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피실험자들에게 특정 단어(긍정적인 단어와 부정적인 단어 50개씩)가 기재된 카드 100장을 외우게 한다. 1시간 정도 영화를 보여준 뒤 아까 봤던 카드 단어를 기억해서 써보라고 한다. 피실험자들은 긍정적인 단어와 부정적인 단어 중 어느 쪽을 더 많이 기억할까. 예상대로 부정적인 단어를 압도적으로 더 많이 기억했다. 우리를 언짢게 하는 단어에 더 민감하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나쁜 기억을 더 오랫동안, 그리고 강렬하게 기억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어찌 저러냐’라고 섭섭해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은 원래 그렇게 진화해 와서 어쩔 수 없다’는 설명이 좀 더 과학적이다.
변호사인 필자에게 형사고소장을 써달라고 방문하는 의뢰인 중 대다수는 그동안 잘 알고 있던 사람을 상대로 고소하려는 경우다. 잘 모르는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분쟁은 상대적으로 적다.
서로 잘 알던 사이였기에 공유하는 비밀이 많다. 이런 비밀 공유는 둘 사이를 끈끈하게 만들어 주지만, 두 사람 관계가 멀어지게 되면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약점, 빌미가 된다.
좋았던 관계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악화했는지 조심스레 물어본다. 의뢰인들은 다양한 이유를 댄다. 물론 대부분 상대방에게 큰 책임이 있다는 투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사소한 오해나 무시하는 말투, 배려심 없는 작은 행동들 때문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고, 그것이 봉합되지 않은 채 상황을 악화시켜 온 사례가 많았다. “난 그런 사소한 일로 화를 낼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라고 말하고 싶을 테지만 ‘사소한 것에 분노하는 것’이 인간이다.
중국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유연천리(有緣千里) 래상회(來相會), 무연대면(无緣對面) 불상봉(不相逢).’ ‘인연이 있으면 천리 밖에 있어도 만날 수 있으나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도 만날 수 없다.’ 인연이 닿아 관계가 시작되었지만 인연의 유통기한이 다해서 작별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면 그에 따라 아름답게 관계를 정리하면 한다. 유통기한 다 한 인연을 계속 복용(?)하다가는 탈이 날 수 있다.
다만 사람과의 관계는 시작할 때보다 끝낼 때가 훨씬 중요한데,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 때문이다. 첫 번째, 관계가 시작되는 단계에서는 그 과정에 다소 잘못이 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잘못을 보완할 기회가 있지만 관계를 끝낼 때는 잘못을 보완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두 번째, 그 사람에 대한 마지막 인상이 부정적일 경우, 이는 그동안의 긍정적인 인상들을 모두 뒤엎어 버리기에 충분하다. 우리 뇌가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끝내야 할 상황이라면, 더 조심하고 배려하자. 그 사람과 좋았던 시간을 기억하자.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그 사람이 같이 있어 주지 않았던가. 각자 가는 길이 달라진다고 해서 서로를 미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조우성 변호사ㆍ기업분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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