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원 무등산을 끼고 있는 광주광역시, 담양군, 화순군에는 자연과 어우러진 문화 및 역사 유적이 많다. 요즘 같이 더운 계절에는 경치 좋은 그곳에서 옛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옛 문화를 체험하며 더위를 떨칠 수 있으니 피서지로도 좋다.
●호남 선비들이 공부한 언덕 위의 별당
그 중 한 곳이 환벽당(環碧堂)이다. 행정구역 상 광주시 북구 충효동에 속하지만 대도시의 번잡함이 일절 없고 대신 물 소리, 새 소리에 녹음까지 더해져 깊은 산골 같다.
환벽당은 광주호 옆 충효교 근처 찻길에서 걸어서 5분 남짓한 거리에 있다. 그곳으로 가는 데는 두 갈래 길이 있는데 그 중 지그재그로 오르는 좁고 가파른 오른쪽 산길은 운치가 있다. 환벽당은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1501~1572)가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집 뒤에 지은 별당이다. 환벽당이라는 이름은 푸르름을 사방에 둘렀다는 뜻인데 지금 붙어있는 현판은 훗날 송시열(1607~1689)이 쓴 것이다. 마루에 앉아 멀리 무등산과 발 아래 창계천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 더운 몸을 식혀준다.
김윤제는 이곳에서 선비들과 교류하고 후학을 키웠는데 그때 운명적으로 만난 사람이 바로 가사문학의 대가인 정철(1536~1593)이다.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과 관련해서는 김윤제가 개울에서 용이 놀고 있는 꿈을 꾼 뒤 실제로 개울로 찾아갔더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정철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당시 정철은 어머니와 함께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지만 김윤제는 몇 마디 대화로 그를 알아보고는 자기 밑에서 공부하게 하고 외손녀와 결혼까지 시켰다. 그렇게 정철은 환벽당에서 공부하며 기대승(1527~1572), 김인후(1510~1560) 등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임억령(1496~1568)에게서는 시를 배웠다.
언덕 위의 환벽당은 사시사철 경치가 훌륭하지만 요즘은 주말마다 다도를 체험하고 남도 소리와 국악을 접할 수 있어 좋다. 마침 그곳을 방문했을 때 갓 쓰고 도포 입은 우아한 남자 악사가 은은한 대금 연주로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다음 차례에서는 목청이 트이고 호방한 분위기의 여자 가수가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로 시작하는 ‘사랑가’를 불렀다. 흥겨운 가락에 신이 났던지 한 관객이 벌떡 일어나 그 가수와 한 소절씩 주거니 받거니 노래를 이어갔다. 소리꾼과 관객의 솜씨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지만 둘이서 같이 노래하는 모습은 보기에 좋았다.
환벽당에서 내려와 산으로 다시 5분쯤 걸어 들어가면 취가정(醉歌亭)이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나 누명을 쓰고 숨진 김덕령(1567~1596)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890년 뒤늦게 세웠다. 정자의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권필(1569~1612)이 꿈에 김덕령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며 취시가(醉時歌)를 부르자 화답시를 지었다는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환벽당과 취가정에서 찻길로 나와 충효교를 건너면 왼쪽으로는 식영정(息影亭), 오른쪽으로는 소쇄원(瀟灑園)이 나온다. 이 중 식영정은 김성원(1525~1597)이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정철보다 열 한 살이 많았으나 환벽당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이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 임억령이 지었다. 식영정은 환벽당과 함께 정철이 ‘성산별곡’에서 노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 정원의 최고봉이라는 소쇄원은 조광조(1482~1519)가 1519년 기묘사화로 목숨을 잃자 제자인 양산보(1503~1557)가 자연에 기대 살겠다며 1530년에 만든 정원이다. 숲과 물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인공 조경은 삼가고 집과 정자를 배치했다. 양산보는 소쇄원을 꾸미면서 소나무 대나무 등 국내 식물 일곱 종, 매화 은행 등 중국 식물 열 세 종, 그밖에 일본산 철쭉과 인도산 연꽃 등을 심었다.
환벽당과 취가정은 광주시에, 식영정과 소쇄원은 담양군에 각각 속하지만 모두 지척에 있는데다 정철과 직간접 관련이 있으니 조선의 가사 문학과 당시 호남 선비들의 풍모를 함께 살필 수 있다.
●30년 만에 개방한 웅장한 기암괴석
무등산의 동쪽이자 소쇄원과 환벽당의 동남쪽에는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병연(김삿갓ㆍ1807~1863)의 이야기가 전하는 적벽이 있다. 화순군 동복댐 상류에서 약 7㎞에 걸쳐 펼쳐진 웅장한 절벽으로, 기묘사화로 유배된 최산두(1483~1536)가 이곳 경치가 중국의 적벽보다 낫다고 한 데서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
일찍이 적벽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선비와 문인은 한 둘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고경명(1533~1592)과, 김인후 임억령 등이 찾아와 글을 썼고 정약용(1762~1836) 역시 적벽에서 시를 읊었다. 전국을 떠돌던 김병연은 수 차례 찾아와 시를 쓰고 끝내는 옆 마을에서 숨을 거뒀으니 죽어서도 적벽과 함께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의 묘는 현재 강원 영월에 있는데 이는 후손이 이장한 것이다.
친근했던 적벽이 우리와 멀어진 것은 1985년 동복댐이 건설되면서다. 댐 건설로 인근 15개 마을이 물에 잠기고 주민은 살던 곳을 떠났으며 사람의 출입은 금지됐다. 그러나 막을수록 들어가고 싶고 못 보게 할수록 보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인지라 적벽을 구경하게 해달라는 요구가 계속 늘어났고 결국 2014년 시범운영을 거쳐 적벽을 개방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적벽 투어는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화순군청 등을 통해 미리 예약을 하고 정해진 버스 편을 이용해 정해진 코스만 보아야 한다.
버스를 타고 좁은 비포장길을 따라 가던 승객들이 차창 너머 아래로 거북섬이 보이자 “와”하며 감탄사를 내지른다. 버스가 왼쪽과 오른쪽으로 꺾일 때마다 장관이 펼쳐진다. 그렇게 비포장길 4㎞를 달리면 초록의 공터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적벽의 웅장한 자태를 구경할 수 있다. 이곳은 노루목ㆍ보산ㆍ창랑ㆍ물염 등 4개의 적벽 중 크기와 자태가 가장 뛰어나다는 노루목 적벽이다. 다만 적벽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절벽이 붉은 색으로 물들려면 석양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 미국 그랜드캐니언이 해질 무렵에 가장 아름답듯 경치에는 햇빛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호수와 건너편 절벽을 구경하고 기념사진을 찍다가 따가운 햇살을 피해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오르는 곳이 바로 망향정(望鄕亭)이다. 댐 건설로 살던 곳을 떠난 주민들이 고향을 바라볼 수 있게 지은 정자다. 망향정 마루에 앉거나 누워서 보는 풍경은, 시야가 달라서인지 아니면 몸이 편해서인지 서서 보는 풍경과 또 다르다.
때마침 서른 명 가까운 중년의 대학 동창생들이 적벽을 구경하다가 망향정으로 올라 앉았다. 잠시 등을 기대거나 누워 쉬는가 싶더니 노래 한 곡 하자는 누군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듀엣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시작으로 서너 곡을 불렀다. 환갑이 멀지 않았으니 굳이 노래 실력을 따질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그 나이의 남자들이 술도 마시지 않은 채 단체로 노래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모이면 종종 같이 노래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 맨 정신으로 노래한 것은 자신들도 처음이라고 했다. 화순 적벽을 보고 조선시대에는 글을 썼지만 이제는 좋은 노래를 부르게 되는 모양이다.
●그 밖의 공간들
광주ㆍ담양ㆍ화순에는 정자와 적벽 말고도 구경할 것이 많다.
그 중 지난해 개관한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은 아시아 각국과 문화를 교류하고 문화자원을 연구하며 각종 공연과 전시를 하는 복합문화기관이다. 극장, 공원, 창작스튜디오, 문화광장 등 여러 시설이 있다. 도심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건물을 지하화했으며 특히 5ㆍ18 때 시민군이 최후까지 싸운 전남도청을 그대로 보존해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광주의 대인시장은 주말 야시장으로 유명하다. 이 때는 시장 전체가 맛난 것을 파는 음식점 겸 멋진 공연을 보여주는 공연장으로 변한다. 삼삼오오 찾아온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여행객들로 시장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주말에 광주를 찾아간다면 빼먹지 않고 들러야 할 곳이다.
담양의 명물인 대나무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으로는 죽녹원이 유명하다. 대나무가 숲을 이룬 죽림욕장이다. 대 숲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과, 바닥에 떨어진 댓잎 밟는 소리에 몸과 마음이 상쾌해진다. 댓잎 이슬을 먹고 자란다는 죽로차 한 잔에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도 좋아진다.
화순에서 들러야 할 곳은 운주사다. 이곳은 지형이 배 모양이라고 하는데, 신라 말 도선국사가 돛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불상과 불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불상과 불탑의 조각 수법은 투박한 편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작가 황석영이 장편 ‘장길산’에서 새 세상을 꿈꾸며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우려 했다고 써 더욱 유명해졌다.
글ㆍ사진=박광희 논설위원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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