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친구’의 대사 중에 “니가 가라 하와이”가 있다. 잠시 하와이로 피해 있으라는 유오성의 제안을 장동건이 거절하며 내뱉은 이 말이 영화 상영 15년 만인 올해 4월 다시 회자됐다.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투 더 프로미스트 랜드(To the Promised Land)’가 최우수작으로 뽑혔다가 취소됐기 때문이다. ‘Now… / International… / Greatness… / A democratic…’으로 이어지는 이 영시의 각 행 첫 자를 따 세로로 읽으면 ‘니가 가라 하와이(NIGA GARA HAWAII)’가 된다.
▦ 이승만은 4ㆍ19혁명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한 다음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주최 측은 뒤늦게 이 시가 이승만을 조롱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수상작 선정을 취소하고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필자를 고소까지 했다. 이처럼 가로로 읽을 때와 세로로 읽을 때 전혀 다른 뜻이 되는 시를 이합체시(離合體詩), 시중 용어로는 ‘세로 드립’이라고 한다. 비판과 풍자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박근혜 대통령,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 나경원 의원,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 등이 ‘세로 드립’의 대상이 됐다.
▦ ‘세로 드립’이 다시 등장했다. 2년 전 세월호 참사 때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 김시곤 당시 KBS 보도국장에게 기사를 빼달라고 한 육성이 공개됐는데 이와 관련해 기자들이 발표한 성명서에 ‘세로 드립’ 작법이 사용된 것이다. 성명서의 각 행 첫 자만 모아 세로로 읽으면 “박주민은 까면서 이정현은 왜 안 까 북한 보도 그만 좀 해”가 된다. 세월호 유가족 변호사 출신 박주민 의원은 나무라고, 이정현 전 수석의 행위에는 침묵하며, 북한 비판 기사는 지나치게 많이 보도하는 KBS 뉴스를 꼬집은 것이다.
▦ 실제로 KBS의 간판 뉴스 프로인 ‘뉴스9’는 이정현 전 수석의 보도 개입 관련 기사를 7일까지 단 한 건도 내보내지 않았다. 방송 통제 논란이 일고, 진상 규명과 청문회 개최 요구가 나오는데다, 청와대의 인사 개입 의혹이 더해졌는데도 KBS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대신 북한 관련 기사는 7일에도 빠지지 않고 내보내 전체 기사 24건 중 4건이나 됐다. KBS가 온 국민의 관심사를 외면하는 가운데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편 등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점점 힘이 붙고 있다.
박광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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