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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삶이었지만 주목받지 못한 죽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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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삶이었지만 주목받지 못한 죽음에 대하여

입력
2016.07.0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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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노먼 파버로, 델 윌리엄스, 마이클 존 케네디, 바버라 아몬드. 지난 2년 간 한국일보에 연재된 ‘가만한 당신’에서 언급된 인물들이다. 마음산책 제공
왼쪽부터 노먼 파버로, 델 윌리엄스, 마이클 존 케네디, 바버라 아몬드. 지난 2년 간 한국일보에 연재된 ‘가만한 당신’에서 언급된 인물들이다. 마음산책 제공

가만한 당신

최윤필 지음

마음산책 발행ㆍ360쪽ㆍ1만5,000원

부고(訃告).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행위 혹은 그런 글을 뜻한다. 신문의 부고란은 장례식장 풍경처럼 휑뎅그레하다. 고인은 없고 가족과 친지만 있다. 부디 많이들 오셔서 유족들을 부끄럽지 않게 해달라는 게 부고란과 장례식장의 공통된 메시지다.

좀더 알려진 사람이 사망했을 경우 그의 죽음은 부고란을 벗어나 부고기사가 된다. 여기서 가치 판단이 개입된다. 누가 알릴 만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 사람인가. 누가 원고지 3매짜리 인간이고 누가 신문 세 면을 할애할 인간인가. 인간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고 하지만 부고기사 앞에선 평등하지 않다. 2014년 4월부터 지금까지 한국일보 지면에 연재 중인 ‘가만한 당신’은 이 가치 판단에 대한 불평불만이다. 저자인 최윤필 기자는 한국일보 최고의 불평분자다.

어떤 이의 죽음은 원고지 3매

또다른 죽음은 3면짜리 기사…

부고 앞에 평등하지 않은 삶에

씩씩대며 호사스런 비석 세우다

이 ‘가만한 당신’이 책으로 나왔다. 지금까지 지면에 소개된 100여 명 중 35명의 이야기를 묶었다. 기사의 양은 동등하게 한 면. 그러나 저자가 노리는 건 망자들에 대한 기계적 평등은 아니다.

2015년 9월 10일, 미국의 심리학자 노먼 파버로(1918~2015)가 사망했다. 자살이 연구의 대상으로 언급조차될 수 없었던 시기에 자살학(suicidology)을 창시했고, 미국 최초로 자살예방센터를 세운 인물이다. ‘자살은 금기, 자살자는 정신병자’로 치부했던 당대의 통념에 맞서, 그는 자살 원인의 상당 부분이 정신병이 아닌 우울증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오늘날 전세계 수많은 자살 충동자들이 정신병자가 아닌 도움이 필요한 이들로 인식되는 데는 파버로에게 빚진 바가 크다. 그가 97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 국내 신문 중 그의 죽음을 알린 곳은 한국일보를 포함해 한 곳도 없었다.

2016년 3월 6일, 미국의 상담의사 바버라 아몬드(1938~2016)가 별세했다. 사회가 저 편한대로 구축한 모성애 신화를 뒤집고 흔들어, 엄마도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위험한’ 주장을 한 인물이다. 아이에게 온전히 헌신하지 않으면 이기적이란 말을 들어야 했던 모든 여성들에게 아몬드의 주장은 말 그대로 구원이었다. 그가 77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도 국내 언론은 침묵했다.

“어떻게 이걸 안 쓸 수 있어?”는 신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매일 한 번은 듣는 소리다. 이유는 다양하다. 무식해서, 바빠서, 몰라서, 지면이 부족해서. 바버라는 36년 간 정신상담의로만 일했고 60세가 넘어 무명의 필자로서 책 한 권을 냈으니 국내에 아는 사람이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970년대 뉴욕 한복판에 최초로 여성을 위한 섹스토이숍을 연 델 윌리엄스(1922~2015)나 마리화나 합법화를 주장하는 잡지를 발행한 마이클 존 케네디(1937~2016)의 경우 데스크 앞까지 보고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통념이든, 현재진행형인 가치 판단 때문이든 이들의 죽음 역시 단신으로도 실리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게재 불가 판단을 받은 영혼들의 죽음에 저자는 씩씩대며 호사스런 비석을 세운다. 지난 세기 이들이 피 흘려 획득한 가치는 지금 우리가 일상처럼 먹고 마시며 누리는 거라고 집요하게 상기시킨다. 그들이 흘린 피가 아직 한국 땅까지 적시진 못했을 때, 추모 행위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향한다. 그들의 죽음이 우리의 현재에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가치들조차 의심 받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게 안타까웠어요. 차별이 나쁘니까 나쁘다고, 고치자고 하는 건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공격을 받는다면 대체 우리의 삶은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인지 의문이 들죠.” (번역가 김명남과의 대담 중)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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