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은 힘겨워도 시간이 지나 추억이 되면 좋은 기억만 남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모른다. 요즘 입시공부가 힘들다지만, 1970년대에 중등학교 시절을 보낸 베이비붐 세대 역시 만만찮은 학습 부담을 견뎌야 했다. 나도 시골 중학 때부터 고교 입시전쟁을 치렀다. 성적 상위권 학생들은 3학년 여름방학부터 으레 ‘강당자습’을 해야 했다. 50명쯤 되는 까까머리들이 아예 이불 보따리를 강당 한 켠에 쌓아놓고 거기서 공부하고 잠까지 자는 일종의 기숙형 야간자율학습(야자)이었던 셈이다.
▦ 나는 그게 힘겹지 않았다. 돌아보면 오히려 즐거운 영상들만 떠오른다. 매일 점호 비슷한 걸 했는데, 한 녀석이 실종됐다. 선생님들은 애가 탔다. 학교 뒷산까지 수색하는 소동 끝에 정오 무렵 찾아냈는데, 녀석은 그 때까지 이불더미 속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공부하던 책상 옆에 이불 펴고 잠 자라고 소등하면 그 때부터 말썽쟁이들이 활개를 쳤다. 한 번은 녀석들이 전교 1등의 고추를 밤새 실로 묶어놓는 바람에 자칫 내시가 될 뻔한 일도 벌어졌다.
▦ 하지만 학생 잘 되라는 취지이고,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해도 획일적 야자가 반드시 좋다고 보지는 않는다. 맞는 학생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학생도 많다는 얘기다. 강당자습을 함께 한 내 친구들 중에도 순한 눈망울에 그림 솜씨가 탁월했던 친구나, 늘 전교 5등 안을 다퉜지만 담배 피우고 시 쓰기를 더 즐겼던 훤칠한 귀공자가 있었는데, 결국 공부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그들이 진작 적성과 재능에 맞는 수련 기회를 가졌다면 황석영이나 서태지 같은 인물도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맴돈다.
▦ ‘9시 등교’를 관철한 이재정 경기교육감이 최근 고교의 획일적 야자를 폐지하겠다고 하자 교육계가 찬반 양론으로 뜨겁다. 반대쪽에선 주로 입시경쟁 현실을 외면한 섣부른 이상주의라는 주장이다. 반면 이 교육감은 획일적 야자 대신 학생들을 풀어주고, 대학 등과 연계해 적성ㆍ재능 활동 프로그램을 마련해주는 게 더 낫다는 얘기다. 대학도 점차 비교과 인ㆍ적성 평가를 늘리는 추세이니 입시와 동떨어진 기획만은 아닌 셈이다. 모두 공부로 성공시킬 수 없다면, 이젠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쓸 ‘여백의 시간’을 줘야 할 때인지 모른다. 단, PC방이나 떠돌게 해선 안 되겠지만.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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