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제 들어섰으니 만사형통하게 도와주마! 일년 삼백육십오일 험한 수 악한 수 막아주마. 삼재반란을 다 막아주고 우환질병을 제쳐주마. 소원만 이루게 도와주마.”
유럽에서 가장 ‘핫’한 안무가 애슐린 파롤린(40)의 신작은 신기하게도 한국의 굿 장면을 패러디하면서 시작했다. 현을 일부 뜯어내 박자만 연주되는 피아노와 굿장구, 징이 어우러진 음악, 굿과 판소리 경계에 선 무용수들의 추임새, 시대와 지역이 뒤섞인 이들의 몸놀림은 가히 ‘컨템퍼러리 아트’적이다. 국립현대무용단과 벨기에 리에주극장이 공동 제작하는 신작 ‘나티보스’다.
“제게 있어 춤은 폭넓고 경계를 가지지 않는 움직임이에요. 한편으로 전통적인 제의의 에너지죠.”
리허설이 끝난 6일 저녁 서초동 현대무용단 연습실에서 만난 애슐린은 “내 모든 작품은 바로 전작에 대한 대답 또는 지속”이라며 “나의 라틴계 뿌리, 여성성, 샤머니즘, 자유 등등 반복되는 주제들, 정처 없이 떠도는 방황이 내 작품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그의 활동무대는 벨기에다. 20대 후반에 기반을 옮긴 애슐린은 이민자, 경계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담은 출세작 ‘06.25.76’(생일을 축약한 숫자가 작품 제목이 됐다)을 2004년 발표하며 유럽에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올해 단 4명을 뽑는 피나 바우쉬 재단의 펠로십 지원자로 선정된 그는 내년 유럽 공연계 바로미터로 꼽히는 벨기에 쿤스텐 페스티벌에 주요 작가로 참가한다.
“남미도 한국만큼이나 샤머니즘에 관심이 많아요. 자료를 찾다 한국도 비슷한 문화가 있다는 걸 알았고, 작품을 함께 만들기로 했죠. 4월 한국에 와서 무용수들이랑 내림굿을 봤는데 그러고 작품이 확 달라졌어요.”
‘서울경기굿’의 일부를 중얼거리는 장면에서 시작한 춤은 비보이를 어설프게 따라하는 듯한 ‘아재’ 독무로 한동안 시선을 빼앗는다. 애슐린이 직접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무용수 4명의 즉흥춤을 발전시켜 각자의 캐릭터를 선보이는 자리다. 임종경은 내림굿 장면을 패러디 하며 작품에 재미를 불어 넣고, 말레이시아 무용수 유용현은 한복 치마를 입고 무당 흉내를 낸다. 유용현이 손으로 입을 찢으며 신음하는 찰나, 연습실 한 구석에서 ‘팔 벌려 뜀뛰기’를 하는 무용수들 앞에 애슐린이 다가가 ‘계속’을 외치며 시범 자세를 보인다. “야 계속 하래 계속!” 간간이 즉흥 추임새가 터질 때마다 곁에서 지켜보던 스태프들이 자지러진다.
“제목인 ‘나티보스’는 스페인어로 원주민이란 뜻이에요. 저는 고전과 현대, 남성성과 여성성처럼 ‘반대되는 것들’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혼란과 혼돈을 통해 새로운 지각을 정립시키고 싶어서. 이 작품에서도 전통과 현대가 맞물리고 강한 남성성 안에서 여성적인 몸짓이 보이기도 해요.”
‘팔 벌려 뜀뛰기’로 시작하는 작품 후반부는 전작 ‘이단자들’(Heretics)에 대한 “대답”이다. “제 작업의 대부분은 정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영역에 접근하려는 노력이에요. 무용수가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마법적이고 강렬하고 섬세한 감정을 작품에서 끌어올리려고 하죠. 전작에서는 정형화된 동작들을 반복되는데 신작에서는 다리와 공간을 더 쓰면서 변형, 발전하죠.”
15~1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세계 초연할 이 작품은 이미 11월 프랑스 브르타뉴 국립극장을 시작으로 벨기에, 이탈리아 등의 6개 극장 투어 공연이 예정됐다. (02)3472-1420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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