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호가 사용한 ‘범블’은? 여성이 먼저 말 거는 데이트 앱’, ‘박유천 사건이 묻어버린 O가지’. 최근 성폭행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야구선수 강정호와 가수 박유천 사건을 전하는 일부 언론의 기사 제목이다. 성폭력 피해자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성폭력 사건의 심각성을 폄훼하는 시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비단 성폭력 사건뿐만 아니다. 지난해 이른바 ‘여혐(여성혐오)’ 담론이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로 등장하고 지난 5월 발생한 강남 살인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국 사회에 뿌리깊은 성차별적 인식과 이를 여과 없이 반영하는 미디어에 대한 비판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젊은 여성들은 “우리를 위한 콘텐츠가 없다”며 기존 미디어를 비판하거나 해외 사례를 소개하고 더 나아가 직접 제작에까지 활발히 나서고 있다.
그 선봉에 선 것이 바로 ‘여성주의정보생산자조합 페미디아’다. 페미디아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만들자’는 목표로 웹사이트를 만들고 활동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기존 언론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성과 젠더 담론에 대한 외신 번역과 연구 소개 기사, 칼럼 등을 다양하게 제공하며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일 서울 동작구 여성플라자에서 페미디아 진달래 대표와 마이크 번역팀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성목소리 실종된 총선 욕하다 ‘급모집’
총선 전날이었던 지난 4월 12일, 페미디아 진달래 대표는 친구와 함께 여성 이슈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총선과 이에 침묵하는 언론을 규탄 중이었다. 이번 총선에서는 2030 유권자를 겨냥한 정책이 실종됐고, 각 당 비례대표에서도 청년 대표들은 당선권 밖에 배치됐다. 지역구에서 여성 유권자 대상 공약을 들고 온 이는 무상 생리대 지급 공약을 내건 노동당 하윤정 후보 정도밖에 없었다. 진달래 대표는 “나를 위한 정책은 없어서 소외 당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총선 전 날, 진달래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 줄짜리 글을 올렸다. ‘여성관련 외신을 번역해 소개하거나 여성주의 연구를 소개하는 사이트를 만드는데 함께 하실 분?’
‘구인’글을 올린 지 약 2주 만에 핵심 멤버가 상당수 모였다. 지금까지 페미디아에서 함께하는 구성원들은 약 100여명이다. 주요 연령대는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 사이로 성별은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다. 약 2주간의 홈페이지 작업 끝에 지난 5월 9일 첫 글(창간사: 더 많은 여성주의를 위해)이 올라왔다.
‘나를 위한 콘텐츠’ 갈구하는 2030 여성들이 모이다
페미디아 설립자들은 창간사에서 “세계적으로 여성운동/성소수자 운동/여성주의/인권 관련 정보와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지만, 한국어권에서는 수요에 비해 전달 통로가 부족합니다. 이미 훌륭한 한국어 여성주의 매체들이 존재하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친구들이 ‘더!’를 외치고 있었습니다”라고 밝혔다.
무려 100여명에 달한다는 구성원들은 어떻게 콘텐츠를 생산할까. 페미디아는 번역ㆍ칼럼ㆍ연구소개ㆍ편집, 게임ㆍ영상ㆍ출판ㆍ미술팀을 두고 관심사에 따라 활동한다. 편집회의는 단체 협업 툴이자 그룹 메신저인 ‘슬랙’을 통해 진행한다. 해외에 체류하는 구성원들도 언제든 참여할 수 있는 이 메신저 회의에서 회원들은 흥미로운 콘텐츠를 소개하고 재가공할 고민을 함께 한다.
마이크 번역팀장은 “소재를 찾기 위해 가디언 페미니즘 섹션을 많이 본다. 페미니즘 관련 글이 많이 올라오는 ‘바이스’와 가벼운 페미니즘 콘텐츠를 다루는 ‘에브리데이페미니즘’, ‘허핑턴포스트’ 등도 참조한다”고 말했다.
‘재미있으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은’제목 선정도 중요한 과정이다. 진달래 대표는 “우리가 일정 수준에서 합의한 단어를 쓰도록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2일 프랑스 한류행사 ‘KCON2016프랑스’의 현지 스태프 선발 과정에서 발생한 성차별 논란을 촉발했던 글 ‘대통령이 오는데 나는 왜 예뻐야 하나’(관련기사 보기)의 제목도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 이 행사의 현지 스태프로 선발된 페미디아 구성원이 선발 공고를 보고 페미디아에 알렸고, 행사 참석 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성차별적 스태프 선발 문제를 제기했다. 진달래 대표는 “제목을 먼저 정했던 경우”라고 설명했다.
‘스탠포드대 성폭력 피해자의 편지’로 버즈피드와 단독 경쟁도
아직 설립 두 달을 맞은 신생 그룹인 페미디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인식되게 된 계기는 스탠포드대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편지(번역보기)가 널리 읽히면서부터다.
지난해 1월 미국 스탠포드대 캠퍼스에서 이 대학 수영선수인 브록 터너가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지난달 현지 법원에서 구치소 복역 6개월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 받았다. 성폭행 범죄임에도 처벌 수위가 터무니없이 낮아 범죄의 심각성과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미국 전역에서 제기됐다. 이 가운데 피해자가 법정에서 가해자에게 직접 쓴 편지를 낭독했고, 지난달 4일 버즈피드가 12장에 달하는 피해자의 편지 전문을 단독으로 공개(기사보기)했으며 이후 CNN에서는 리포터가 20여분에 걸쳐 편지 전문을 낭독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국내에서도 페미디아가 성폭행 피해자의 편지를 버즈피드가 공개한 직후인 지난달 9일 전문을 번역해 공개했다. 마이크 번역팀장은 “버즈피드에 기사가 올라오기 전에 편지를 먼저 받아 따로 번역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률가로 ‘성희롱(Sexual harassment)’의 개념을 처음 정립한 캐서린 맥키넌 교수 밑에서 법학 공부를 하던 페미디아의 구성원이 맥키넌 교수에게 피해자의 편지를 받아 게재를 의뢰했다.
마이크 팀장은 “전문 번역을 해도 좋다는 피해자측 허락을 받은 것인데다 편지 내용이 감동적이어서 빨리 보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번역 지원자가 바로 나섰고, 주말 내내 번역했다. 편집을 고민하는 사이 버즈피드에서 기사가 나왔고 급히 편집을 마무리해 다음날 게재하게 됐다”고 말했다.
출판, 게임 개발까지… 형식 넘나들며 콘텐츠 제작
페미디아의 콘텐츠는 비단 외신과 연구소개에만 그치지 않고 출판, 게임 제작에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지난달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진행한 출판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은 지난 5월 발생한 강남 살인사건 이후 여성혐오를 둘러싸고 남성들과의 대화에서 답답함을 느낀 저자가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을 주제로 대화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실전용 매뉴얼’을 책으로 내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냈고, 페미디아가 독립출판사로 등록해 출판을 맡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텀블벅에서 진행된 펀딩에서 처음 목표 모금액 200만원을 뛰어넘는 4,300여만원이 모였다. 1쇄만 5,000부를 찍었다. 마이크 번역팀장은 “사실 300부만 찍어도 많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너무나 좋았다.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에 돌리기 위해 여러 권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페미디아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여성이 겪는 언어폭력을 주제로 한 게임을 개발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형식의 콘텐츠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페미디아의 다양한 시도와 접근 방식은 대체로 좋은 평을 받고 있다. 트위터 유저 @Laurelinan은 “다른 데서는 전문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좋은 글을 읽어도 가끔 과잉감정에 지치게 되는데 페미디아는 불필요한 감정 띄우기를 걷고 정리된 이야기를 편하게 볼 수 있어서 더 와 닿는다”고, @this_is_a_gun 은 “평범한 헤테로 남성인 내가 페미니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할 것인지 인사이트를 주는 내용이 많다”고 평했다.
최근 페미디아는 여성주의 매체로서의 지속가능성을 모색 중이다. 협동조합화를 진행하며 오는 8월엔 총회와 워크샵도 예정돼 있다. 진달래 대표는 “저희는 수요에 따라 한다기보다는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콘텐츠를 생산한다”며 “조합화를 하고 사업으로 계속 진행할 때 구성원들을 다시 모을 수 있고 대가도 치러 주는 구조를 만드는 것을 계속 고민중”이라고 말했다
글ㆍ사진=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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