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작가를 소녀니 마녀니 구분 짓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소녀란 말 외에 은희경으로부터 떠오르는 다른 단어를 찾기는 쉽지 않다. 참새 같은 다리, ‘에헤헷’하는 미소. 은희경의 주인공들은 사랑을 보답 받지 못할 걸 알고 있는 소녀들이다. 삶의 심술에 매번 놀라고, 놀란 가슴을 추스르느라 하루를 다 쓰고, 결국 종일 울어 퉁퉁 부은 얼굴로 중얼댄다. “몰랐지, 내가 이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은희경 작가가 여섯 번째 소설집 ‘중국식 룰렛’(창비)을 펴냈다. 위스키, 신발, 가방, 수트, 수첩 등 특정 사물을 소재로 풀어낸 여섯 개의 이야기가 담겼다. 4일 소공동 한 카페에서 작가를 만났다.
“제 소설 속 인물들은 늘 욕망이 없어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니까 욕망하지 않는 거죠. 그런데 처음으로 이게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포기해버리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니까요. 이번 소설을 정리하면서 스스로 약간 바뀌었다고 느꼈어요. 절대 안 쓰던 해피엔딩도 써보고 아주 뜨겁고 정열적인 여자도 등장해요. 아주 많이 바뀐 거 같진 않지만(웃음)…전 제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걸 알고 있어요.”
표제작 ‘중국식 룰렛’은 위스키 바에서 만난 불운한 네 남자의 이야기다. 각자의 기막힌 불운을 털어 놓는 와중에 한 여자가 공통분모로 떠오른다. 남편을 두고 옛 남자에게 한 번 같이 자달라는 여자.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남편과 관계를 하고 나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든다고요. 왜 이런 단조롭고 평범한 일을 남편 아닌 사람과 해서는 안 된다는 걸까”. 청을 받은 남자는 잠자리에 실패해 불행하고, 다른 남자는 그 여자가 자신의 아내인 것 같아 불행하고, 또 다른 남자는 앞의 남자가 아내가 아닌 자기를 바라봐주길 원해서 불행하다. 이 정도면 망한 인생들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에서 위스키 바 주인이 ‘천사의 몫’에 대해 이야기한다. 위스키가 숙성하는 동안 증발하는 2%를 ‘천사의 몫’이라고 부르는데, 천사가 가져가는 2%의 행운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불운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증발한 2퍼센트를 가지고 전체를 비관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둡고 답답한 삶의 한 구석에 작은 빛의 웅덩이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뒷걸음치다가 빠졌을 때 다정한 부력이 온몸을 감싸 안아주는 그런 이야기요.”
‘대용품’에선 두 영재 소년이 등장한다. 지능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두 친구 중 J에겐 비밀이 있다. 출생 신고를 늦게 하는 바람에 친구보다 한 살이 많다는 것. 진짜 영재인 친구와 하나로 묶일 때마다 J의 죄책감은 커지지만 정작 출생 신고를 한 아버지는 일언반구도 없이 오히려 큰 이득을 본 양 즐거워한다. 지능검사를 받으러 서울로 올라가는 길, 버스 전복 사고로 친구는 즉사하고 J는 비로소 평범한 소년으로 돌아가지만 자신이 한때 모두가 바라던 영재의 대용품이란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른이 되는 건 아버지처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거짓의 세계와 그 정도 거짓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어른의 세계” 내 것이 아닌 이름, 내가 찍은 적 없는 발자국. 거짓말을 거부한 소년은 어른이 되지 못하고 세계와 삶으로부터 유리된다.
“저는 제가 어른이 되지 못한 게 좋았어요. 그런데 이 소설을 쓰는 중 세월호 사건이 터졌고 이렇게 계속 어른이 아닌 채 살아도 괜찮을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어쩌면 제가 조금이라도 변한 이유일지 몰라요. 변하지 않기엔, 현재의 이곳이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황인 건 확실하니까요.”
작가는 현재 장편소설을 준비 중이다. 1970년대 말 여자 기숙사를 배경으로, 갓 서울에 올라온 19세 소녀가 이질적인 환경에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다. 작가는 “내 이야기”라고 말한다. “언젠가 꼭 써야지 생각했던 이야긴데 막상 시작하니 그 이유를 잊어 버린 거 있죠. 그런데 사실 저 늘 잊어 버려요. 소설을 쓰는 과정이 그 이유를 다시 찾아내는 과정이에요.”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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