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다쥐르 해변이 펼쳐지는 프랑스의 니스, 스페인 왕가의 휴양지였다는 산세바스티안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거주민보다 관광객이 더 득시글한대도 다국적 프랜차이즈를 찾아보기 어렵다. 평소 대형마트나 프랜차이즈 상점보다 주인장의 취향이 살아있는 가게들을 들락거렸지만, 낯선 로컬 가게들만 보이는 이국의 땅에서는 까르푸나 맥도날드처럼 아는 이름이 반갑다.
그러다 어느 날 까르푸에서 찬거리를 사게 됐다. 무심코 받아 든 영수증이 얇은 기름종이처럼 팔랑거렸다. 반질반질하고 질 좋은 종이에 영수증을 찍던 것이 아까웠던 터라, 종이를 절약한 얇은 영수증을 요리조리 들여다보았다. 영수증 뒷면에는 불어를 모르는 나도 이해할 수 있는 두 가지 로고만 찍혀 있었다. 하나는 FSC 마크로 지속 가능하게 관리되는 산림에서 생산된 친환경 목재를 사용한다는 로고였고, 다른 하나는 영수증에 비스페놀류의 유해물질이 들어있지 않다는 의미였다. 이와 달리 대부분의 국내 영수증 뒤편에는 약관과 거래 조건이 빼곡히 차있다.
영수증으로 사용되는 감열지에는 비스페놀A나 비스페놀S 등의 성분이 사용되어 왔다. 비스페놀류는 체내에서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젠처럼 작용하는 환경호르몬으로, 정자 수를 감소시키고 유방암에 영향을 주고 비만을 일으킨다고 의심받는 물질이다. 이 때문에 젖병이나 영ㆍ유아 식기에는 비스페놀A가 금지되었고, 곧이어 비스페놀A가 들어있지 않은 플라스틱 물병과 식품 용기가 자리 잡았다. 아마 집집마다 ‘비스 프리’라고 적혀 있는 플라스틱 용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수증에는 여전히 비스페놀류가 사용되며 규제도 없는 실정이다.
지난 5월 한국의 ‘까르푸’에 해당하는 대형마트와 백화점의 영수증에 들어있는 비스페놀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대형마트 3곳과 백화점 3곳, 총 6곳에서 19장의 영수증을 분석한 결과 1곳의 대형마트와 백화점을 제외한 다른 모든 영수증에서 비스페놀이 검출되었다. 롯데백화점과 롯데마트는 이미 2014년부터 당사의 영수증에 비스페놀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조사에서도 검출되지 않았다. 미리 결과를 받아본 업체 중 신세계백화점만이 비스페놀이 들어있지 않은 영수증으로 교체할 계획을 밝혀왔다. 이에 반해 환경부는 비스페놀A의 유해성을 검토하는 단계지만 유럽연합에서 유해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고 영수증을 먹지만 않는다면 유해성을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유럽연합은 유럽 시민들의 현재 비스페놀A 노출량이 기준에 비해 낮다고 밝혔을 뿐 비스페놀A 자체의 기준은 더 엄격하게 높였다. 이를 증명하듯 유럽연합 한복판의 프랑스에서는 까르푸처럼 비스페놀류가 들어있지 않은 영수증이 대세다.
사실 영수증에 유해물질이 들어있다 한들 받자마자 버리면 되고 만진 후 손을 깨끗이 씻으면 된다. 그러나 한 해 동안 사용된 종이 영수증의 양이 지구 둘레 62.6 바퀴의 길이고 10톤 트럭 1,340대의 무게에 달한다. 영수증이 재활용될 경우 또 다른 제품에서 유해물질이 나오고 폐기될 경우 땅과 바다에 유해물질이 쌓인다. 이것저것 떠나 논란이 있는 물질을 안 쓰고도 영수증을 찍을 수 있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업체의 자발적인 선의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2015년부터 모든 식품 용기에서 비스페놀A를 금지했고 환경부 장관이 까르푸 매장을 방문해 유해물질 없는 영수증을 홍보하는 과정을 거쳤다. 스웨덴 역시 식품 용기는 물론 영수증과 수도관 내부에서 비스페놀A의 사용금지를 검토 중이다. 프랑스에서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확립한 반 고흐는 “위대한 일은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을 때 이룰 수 있다, 결코 우연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가습기 살균제로 앓고 있는 우리 사회에 정녕 필요한 말이다.
고금숙 여성환경연대 환경건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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