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도 움켜쥐고 태평양의 미군도 공격할 수 있는 무수단 미사일 발사도 성공했으니 다시 평화공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상호 신뢰와 힘의 뒷받침이 없는 평화협정이 얼마나 무망한 것인지 사례를 살펴보자.
#1. 뮌헨 평화협정(1938, 9, 30)은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이 맺었던 협정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년 전 히틀러가 체코의 주데텐 지역의 독일인 주민의 보호를 명분으로 위협을 가하자 당시 유화정책을 펴고 있었던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은 이 지역을 양보함으로써 전쟁을 막았다며 ‘우리 시대의 평화가 왔다’고 자랑했고,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6개월 후, 독일은 체코를 점령했고 다시 6개월 후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대전의 서막을 열었다. 히틀러에 농락당한 체임벌린은 통탄했으나 이미 늦었다.
#2.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1939, 8, 23)을 맺자 세계는 경악했다. 불구대천의 사이인 히틀러와 스탈린이 폴란드 침공 일주일을 앞두고 일시적인 이해관계가 합치되자 의기투합했다. 2주 간격으로 폴란드를 침략하여 반씩 나누고 동유럽을 적당히 요리했다. 동상이몽의 재미는 그때까지였고, 2년도 안 돼 독일이 소련을 침공(1941, 6, 22)하였다. 스탈린은 전쟁 개시의 무차별 폭격이 진행되었는데도 영국의 허위 첩보일 것이라 반신반의했고 제정신을 찾자 공황에 빠졌고, 전선은 철저하게 유린당한 뒤였다.
#3. 미국과 남?북베트남이 파리평화협정(1973, 1, 27)을 맺었다. 북베트남은 협상과정에서 미군 철수를 집요하게 요구했고, 반전 여론에 시달리던 닉슨 행정부도 발을 빼고 싶었다. 협정체결 2달 만에 미군은 완전 철수했고 잠시 평화가 찾아오는 듯 했다. 협상의 주역인 키신저는 그 해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미군이 철수하자 군사적 균형이 무너지고 전세는 역전되었다. 총공세 55일 만에 사이공은 함락(1975, 4, 30)되었고 평화협정 체결 2년 만에 베트남은 공산화되었다.
위의 세 가지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 평화협정과 불가침조약은 당사국끼리의 일시적인 이해관계가 합치되면 침략 기도를 숨긴 후 평화로 위장하였다가 상대방을 농락시켜왔다. 세 사례 중 북한은 한국판 베트남식 평화협정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리수용 전 외무상이 작년 10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 ‘미?북간 평화협정 체결’을 재점화하여 공론화시킨 후 파상 공세를 펴더니, 김정은이 지난달 제7차 당대회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남조선에서 침략 군대와 전쟁장비를 철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평화라는 말 자체는 솔깃하고 평화협정도 언젠가는 가야 할 지향점이다. 6ㆍ25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63년, 교전 당시의 쌍방 군사령관들 간의 군사적 성격의 정전협정은 이제 당사국 정부 대표들이 정치적 성격의 평화협정을 맺어 현재의 전쟁 상태를 법적으로 종결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만들어 평화통일의 기반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은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새로운 이정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적화통일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정전협정의 연장선에서 당사자인 우리를 배제하고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비핵화는 평화협정과 연계가 불가하고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북한은 미ㆍ북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되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거나 철수 명분을 확보하여 유엔사ㆍ연합사의 해체 등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이다. 핵을 고도화하고 미사일을 쏴대면서 도발과 위협을 하다가 평화를 앞세워 모처럼 조성된 국제공조의 틈새를 파고들어 남남갈등을 부추기려는 얕은수가 보인다. 특히 정치?군사적인 신뢰가 전혀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평화협정의 논의는 앞의 사례와 같이 허망해 보인다. 한반도 군사 질서를 규율하고 있는 정전협정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그보다 더 허술할 수 있는 평화협정을 맺자고 하는 것은 그 저의를 의심치 않을 수 없다. 북한이 평화협정을 맺고 싶으면 우선 정전협정부터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그 자체로 신뢰가 쌓이고 평화협정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장광일 동양대 국방과학기술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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