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는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ㆍBrexit)로 나타났다. 51.9%대 48.1%의 개표결과가 보여주듯 이번 투표 결과는 일방적 지지는 아니었다. 많은 영국 국민들은 투표를 앞두고 잔류와 탈퇴 사이에서 고뇌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 보다 더 많은 국민들은 이 결정이 가져올 궁극적 영향과 세계사적 의미보다 그들의 감정과 주변의 영향에 이끌려 투표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투표의 결과는 향후 영국뿐 아니라 유럽, 그리고 세계가 걸어가게 될 길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통합의 길 방향 바꾸는 큰 충격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요동치는 것은 초기 반응일 뿐이다. 더 중요하면서 장기적인 영향은 이번 결정이 향후 세계의 정치지형과 경제지형을 바꾸게 되리라는 것이다.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설립 이후 유럽은 줄곧 통합의 길을 달려왔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주권국가를 확립하고 근대 정치경제 제도를 도입해 왔던 유럽이 지난 60여년간 다시 각국의 주권을 포기해가면서 인류가 과거 실험해보지 않았던 초국가적 공동체를 발전시켜 온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옳은 방향의 길이었다.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 선택은 세계 경제질서의 흐름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세계화로 인해 상품, 자본, 정보시장에서 국경이 사라지면서 세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단일 경쟁규칙, 단일 감독규준을 마련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단일 중앙은행, 금융감독기구, 공정경쟁위원회, 그리고 이를 관장할 세계 정부를 설립하는 일이다. 시장현실과 제도의 불일치, 즉 시장은 통합되고 있는데 정치와 정책은 주권국가의 국경에 갇혀있는 것이 오늘날 세계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모순이며 불확실성의 원천이다. 2차 대전 후 세계는 유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등 다자간 기구들을 설립하며 국가간 협력을 통한 새 질서를 모색해 왔으나 그러한 다자간 기구들의 역할은 이미 한계를 노출했다. EU가 지난 60여년간 추구해온 길은 향후 세계가, 인류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앞서 실험하며 개척해 온 것이었다. 지난 수세기 자유시장과 자유무역, 개방주의에 앞장서 온 영국이 이번 국민투표로 내린 결정은 그 길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큰 충격을 가져온 것이다.
이 역사의 역류가 부분적 소용돌이에 그칠지 아니면 지구촌의 태풍으로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이는 상당부분 앞으로 영국과 유럽, 그리고 세계가 이 결정에 어떻게 대처하게 될지에 달려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번 브렉시트 결정이 결코 우연히 돌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 이후 냉전시대가 무너지고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이미 태동되어온 것이며 보다 가까이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인해 촉발된 것이다. 중국과 구 사회주의 체제 국가들이 시장경제 체제로 편입되면서 세계화가 가속화하고 국가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지난 30년간 세계경제의 무게 균형은 서서히 변해왔다. 일본, 중국 및 신흥 경제국들이 부상하면서 미국과 유럽 경제의 경쟁력 상실과 상대적 위축은 지난 2, 3세기 ‘팍스 브리타니카’, ‘팍스 아메리카나’를 이어오며 세계 경제질서를 관장하던 영국과 미국이 탈 제조업, 탈 서비스업화하며 경제의 금융화를 초래했고 이는 세계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높였다. 결국 2008년 미국에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로 미국과 유럽에서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이 일어나고 소비, 투자가 위축되면서 세계는 수요부족, 저물가, 저성장의 만성병을 앓기 시작했다. 국내 수요위축을 해외수요 확대로 만회하려고 환율절하 유도를 위한 주요국들간 통화전쟁이 시작되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호주의가 부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더불어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되어온 소득의 양극화는 바로 소외된 계층들에 쌓여온 불만의 기름에 쉽게 불을 붙일 수 있는 정치환경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1930년대와 유사한 세계경제 상황
20세기 초 유럽의 베스트셀러는 ‘우주의 수수께끼(The Riddle of Universe)‘와 ‘위대한 환상(The Great Illusion)’ 같은 미래에 대한 낙관론에 가득 찬 책들이었다. 전자는 독일 생물학자 어니스트 헤켈의 저서로서 ‘과학의 발전은 전쟁을 포함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자는 영국 경제학자 노만 에인절의 저서로 ‘국가경제 간 상호의존성 증대로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단언했다. 19세기 후반에도 전신, 전화, 철도, 증기선 등 통신ㆍ운송 수단의 혁명으로 세계화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고 상품뿐 아니라 자본ㆍ인력의 국경 간 이동이 급속히 늘어났다. 이처럼 각국 경제의 상호의존도가 심화된 상황에서 상대방을 파괴하는 전쟁은 스스로의 피폐를 가져올 뿐이라고 단언한 책이 베스트셀러로 팔려 나간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세계는 제1차 대전, 제2차 대전으로 빠져들었다. 과학의 발전은 대량살상무기의 발명으로 이어졌으며 세계화의 진전은 국가간 갈등을 심화해 수천만 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1930년대와 지금의 세계경제 상황은 매우 유사하다. 수요부족과 공급과잉의 지속으로 인한 디플레, 소득분배의 악화, 금융불안과 성장의 정체가 그 것이다. 당시에도 각국은 국내수요 위축을 해외수요로 만회하기 위해 경쟁적 환율절하와 수입장벽 강화를 통한 ‘근린궁핍화’ 정책을 펼쳤으며 그 결과 세계교역은 크게 위축되었다. 19세기 전반 유럽의 자유주의와 합리주의는 오히려 지금 못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럽은 나치즘과 파시즘의 득세를 막지 못했다. 히틀러도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독일의 지도자였다.
지난 수년간 세계 각국의 정치지형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국내 경제의 침체, 일자리 축소, 소득의 양극화를 이민 증가 탓으로, 개방 탓으로, 다른 나라와 협력하는 탓으로 돌리려는 정치인과 정당들의 득세가 늘고 있다. 이번 영국의 투표결과가,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 결과가 그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진실은 반대다. 영국은 EU에 가입함으로써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었고, 더 높은 성장을 할 수 있었으며 EU의 멤버로서 더 적은 비용으로 국가안보를 유지하며 유럽과 세계문제에 더 많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세계사는 개방과 포용을 택한 나라들의 융성과, 폐쇄와 배척을 택한 나라들의 쇠락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소득 양극화, 소외된 중산층 증가는 이러한 정치지형의 변화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 세계 경제력의 다극화와 미국의 리더십 퇴조, 국제통화질서의 붕괴, 유명무실해진 WTO와 유엔은 결국 국가들로 하여금 각자도생의 전략에 의존케 하고 있으며, 세계를 다시 1930년대와 같은 통화전쟁, 보호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하고 있다.
영국의 국민투표가 당장 영국을 EU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아니다. 탈퇴 협상은 수년 혹은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전례 없던 새로운 일을 해 나가는 것이며, 지난 43년간 실타래처럼 얽힌 영국과 EU의 정치, 경제 관계를 무 자르듯 쉽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영국과 유럽, 세계의 교역과 투자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전 세계 주가와 환율이 큰 폭으로 요동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시장의 불안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미 브렉시트가 결정된 이상 첫 번째 과제는 영국과 EU가 향후 수년간 진행될 탈퇴 협상을 통해 상호 통합적 요소를 최대한 유지해 이번 결정이 가져올 부정적 효과를 줄이는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변화된 세계의 정치경제 지형이 각자도생 전략으로 인한 대립과 갈등의 심화로 또 다시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세계가 다자간 협력기구, 다자간 대화 채널의 기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다.
한국 사회도 국가적 도전에 직면
지난 20여년간 한국사회에서 진행되어온 소득격차의 확대, 기득권의 담합과 유착에 의한 계층의 고착화는 대중의 소외감과 박탈감을 크게 증가시켰다. 국민들의 법질서와 정부에 대한 불신은 어느 나라보다 깊다. 동시에 한국경제는 대외의존도가 매우 높고 한반도는 강대국간 갈등소지와 군사안보적 긴장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이미 국내외적으로 수 많은 과제에 짓눌려 있는 우리에게 브렉시트로 인한 향후 세계 정치, 경제 지형의 변화는 심대한 국가적 도전에 직면케 할 것이다. 한국 정치와 사회가 분열 아닌 통합으로 나아갈 때, 그리고 이를 위한 제도혁신을 적시에 이뤄낼 때 비로소 이 도전을 헤쳐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지금의 한국 지도자, 국민들이 이 시대적 과제에 어떻게 대응해 가는지를 미래 역사는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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