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이었다. 프로야구 LG 트윈스 선수단은 ‘터닝포인트 혁신 교육’이란 이름의 워크숍을 실시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이후 2년 연속 하위권에 처진 팀 분위기를 혁신하고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자는 취지로 마련된 행사였다.
프로그램은 마치 ‘차력쇼’를 방불케 했다. 2㎝ 두께의 송판에 선수들의 평소 약점과 시즌 목표를 적게 한 뒤 주먹으로 격파하도록 한 것은 애교에 가까웠다. 워크숍의 마지막엔 500도가 넘는 숯불 위를 선수들이 맨발로 걷도록 했다. 선수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이를 통해 ‘불가능은 없다’는 신념을 갖도록 하는 게 ‘숯불 걷기’의 목표였다. 나름의 안전장치가 마련돼 있어 부상 위험이 없다는 주최 측의 설명이 있었지만 벌겋게 달궈져 연기가 피어 오르는 숯불 위를 걷는 것은 ‘강심장’을 가진 선수들에게도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망설이던 선수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불 위에 올라섰고, 이에 용기를 얻은 선수들은 “나는 할 수 있다”고 외치며 ‘숯불 걷기’를 시작했다. 선수들은 집단 최면에 걸린 듯 “불 위를 걸었는데 못할 게 뭐가 있겠냐, 올해 우승할 자신이 생겼다”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LG 트윈스의 그 해 성적은 어땠을까. 8개 팀 가운데 6위였다. 선수들의 충만했던 자신감이 성적으로 연결되기까지 시간이 좀더 필요했을까. 그런데 그 이듬해 LG 트윈스는 6위에서 더 추락해 꼴찌를 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성적 부진에 빠진 스포츠 구단들은 분위기를 바꿔보겠다며 극기 훈련을 선택했다. LG뿐 아니라 대다수 프로야구 팀 선수들은 해병대에 입소해 혹독한 군사 훈련을 받았고, 겨울 산에 올라가 얼음을 깨고 맨몸으로 뛰어들어 정신력을 가다듬었다. 많은 스포츠팀의 지도자들이 승리하기 위해 기량 못지 않게 승부 근성과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던 시절이었다.
한 때 열풍처럼 유행했지만 아직도 이런 방식으로 선수들의 정신력을 담금질하는 팀은 거의 없다. 대신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구단 운영이 자리를 잡았다. 경기에서 직접 뛰는 것은 사람이기에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체력, 기술, 그리고 선수들간의 팀워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실적이 악화되고 성장 한계에 직면한 기업들 역시 조직을 혁신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바뀌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고, 그 중에서도 사람과 조직의 혁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SK네트웍스 현대중공업 대한전선 등 몇몇 기업들이 임직원을 대상으로 해병대 훈련을 실시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정신력을 다지고 느슨해진 기강을 바로잡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이 회사들의 최고경영자(CEO)는 모두 해병대 출신이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대식 사고 방식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면 좋겠지만, 이런 방식은 다른 많은 기업들의 고민과는 출발점부터 확연히 달라 당황스럽기도 하다. 과거 선진 기업을 따라잡아야 하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시절에는 군대와 같은 일사불란한 조직력이 필요했지만, 새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선발주자(First Mover)’에겐 창의ㆍ혁신이 필요하고, 우리 기업들은 그런 점이 부족하다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기 때문이다.
많은 기업들이 ‘까라면 까는’ 상명하복 문화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진단하고 있고, 대한상공회의소도 후진적인 기업문화 바꾸기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한쪽에선 일하는 방식을 포함한 모든 것을 혁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자기파괴적 혁신’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아직 몇몇 기업의 눈높이는 ‘자학적 군기잡기’에 멈춰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준규 산업부 차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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