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때 美정부가 나서
군인들에게 1억2000만부 보급
총격과 질병의 고통 잊게 해줘
군복 주머니용 문고판 뜨는 등
전쟁이 출판계에도 커다란 영향
전쟁터로 간 책들
몰리 굽틸 매닝 지음ㆍ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발행ㆍ336쪽ㆍ1만5,000원
책은 무기다. “읽는 사람을 꽉 깨물고, 머리를 한 대 쳐서 잠을 깨우고, 얼어버린 내면의 바다를 깨뜨리는”(카프카) 것은 물론, 때로는 전쟁과 싸움을 지탱하는 도구 그 자체가 된다. ‘전쟁터로 간 책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필수물자로 대접받은 책과 미치지 않기 위해 책 한 권을 부여잡을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다.
저자 몰리 굽틸 매닝은 미국 변호사로 국내엔 처음 소개된다. 그는 찰스 스크리브너 출판사 기록보관소에서 자료수집을 하던 중 수두룩하게 쌓인 군인들의 옛 편지를 발견했다. 악천 후, 질병과 싸워야 하는 전장의 시름을 덜어준 문고판 책을 보내줘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흥미를 느낀 매닝은 제2차 세계대전과 책의 이야기를 조사했고, 진중문고(Armed Services Editionsㆍ陣中文庫)에 관한 이 책을 2014년 내놨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미국의 출판계와 정부, 사서들은 미군에 1억 2,000만부 이상의 책을 제작해 전달했는데, 이 전무후무한 프로젝트에 불을 붙인 것은 역설적이게도 히틀러의 분서(焚書) 만행이었다. 나치 정권은 1933년 눈엣가시 같은 책들을 소각, 소거했다. 베벨 광장 한가운데 마련된 길이 3.7m, 높이 1.6m의 장작더미에 ‘비독일적’ 책들을 던져 넣은 화형식은 이 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의 뜻있는 사서들, 정부, 출판계를 중심으로 이런 ‘책 학살’에 대항해 사상의 자유, 인간의 가치 등을 담은 책을 전장에 보급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번졌다. 곧 작가, 언론인, 편집인, 정부인사 들이 중심이 된 ‘전시 도서 보급 계획’이 추진됐고 군복 주머니에 들어갈 가볍고 작은 문고판의 출간과 보급 작전이 대대적인 막을 올렸다.
책을 받은 군인들의 환대는 기대 이상이었다. 책은 끝 없는 진창과 총격, 빗물 고인 참호, 곡사포의 비명과 날벌레, 장티푸스 등 질병에 허덕이던 이들을 잠시 다른 곳으로 데려다 줬다. 전선에 책이 배달되는 날이면, 금세 이를 받아가기 위한 줄이 생겼다. 자기 차례라고 마음에 드는 책을 한참 고르고 있다가는 “전우여, 책을 집었으면 빨리 비켜라”는 눈총을 받았다.
저자는 꽤 유려한 글 솜씨로 책이 제작되고 전선에 전해지는 다채로운 장면들을 복기한다. 영국 수송선을 빌려 탄 한 부대의 책 더미를 영국 군인들이 넋을 잃고 쳐다보며 “왜 우리 정부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느냐”고 토로했다거나, 눈이나 비를 맞은 책을 하도 돌려보다 보니 마모가 빠르고 심했는데 이 낡은 책을 회수하려 할 때마다 군인들이 거센 항의를 했다는 사연 등도 담겼다.
거꾸로 전쟁이 출판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한번 목록에 오르면 8만 5,000부에서 15만5,000부를 찍어 보급됐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여기 포함돼 빠르게 고전 반열에 오른 대표작으로 소개된다. 앞서 볼품없는 문고판, 즉 페이퍼백(paperbackㆍ종이 한 장으로 표지를 싼 간편한 책)을 경시하고 양장본을 고수했던 이들의 인식도 변해갔다.
저자의 관심은 ‘올바른 책이 (군인들의) 혼을 정상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낯간지러운 독서 캠페인을 벌이는 것도 아니다. 그는 미국인 조차 잊고 있었던 미국사의 한 장면과 지난한 고통과 싸운 인간들이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딘 방법을 복원한다. “그 어떤 사람이나 힘도 이 세상으로부터 각종 독재에 맞서 싸우는 영원한 투쟁의 구현체인 책을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책이 무기라는 것을 잘 압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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