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이 어디 대우조선에서만 그랬을까 싶다. 산업은행의 출자회사가 비금융사만 130곳이 넘는데,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낙하산은 아마 수도 없이 투하됐을 것이다. 대주주이면서도 출자금 회수엔 무심하고, 채권자이면서도 대출건전성은 외면한 채 그저 갑질과 단물에만 취해온 산업은행이었다.
원래 이렇게 뻔뻔한 곳은 아니었다. 1970~80년대엔 당당한 성장의 주역이었다. 금융은 불모지였고 모든 투자가 불확실했던 그 시절, 리스크를 떠안고 기업들에게 거액의 설비자금을 빌려 줄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산업은행뿐이었다. 조선소를 세울 때도, 제철소를 만들 때도,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도 모두 산업은행에서 돈이 나왔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예외 없이 산업은행 대출을 안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애초 그런 역할을 위해 정책적으로 탄생한 산업은행은 산업화 과정에서 개발금융의 소임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굴절은 외환위기 이후부터다. 대기업이 부실해지면 정부는 국민경제 파장을 이유로 퇴출보다 채권은행에게 일단 떠안기는 방식(워크아웃 또는 자율협약)을 택했고, 그 결과 대부분 부실 대기업들은 출자전환을 통해 산업은행 자회사로 편입됐다. 대우가 그랬고 STX가 그랬으며 금호아시아나, 동양, 동부도 그랬다. 대기업들이 어려워질수록 산업은행의 몸집은 계속 커졌다.
출자전환은 기본적으로 임시주차의 개념이다. 채권단이 잠시 희생해서 회사를 정상화시킨 다음 빨리 매각해 돈을 회수하라는 취지다. 하지만 산업은행 자회사로 일단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는 법이 없었다. 덩치가 큰 기업일수록 더 그랬다. 산업은행이 출자전환한 기업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장부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오로지 자리보전에만 몰두했다는 사실은 대우조선 케이스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통해 이미 확인된 바다.
집중포화를 맞은 산업은행은 지난 23일 혁신안을 발표했다. 고개 숙여 사과한 이동걸 회장은 임직원 재취업 금지와 함께 3년 내 자회사 매각을 약속했다. 이중 얼마나 이행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회사 개수나 낙하산 횟수가 산업은행 개혁의 잣대는 아니라고 본다. 산업은행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려면 최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첫 번째는 부실기업 처리방식이다. 부실화하는 대기업은 언제든 생겨날 텐데 정부가 퇴출 대신 산업은행에 떠안기는 맡기는 손쉬운 처방을 고수하는 한, 산업은행 자회사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제값을 받지 못하면 감사원 문책이 기다리는 현실에서 산업은행은 매각을 주저할 테고, 자회사 관리라는 이름으로 낙하산은 결국 다시 펼쳐질 것이다.
두 번째는 정부와 산업은행의 관계다. 지난 7~8년 간 산업은행 조직은 결합과 해체를 반복했다. 이명박정부 시절 정책금융부문을 떼어내 정책금융공사(모회사)-산은지주(자회사)-산업은행(손자회사) 체제로 만들었고 민영화, 메가뱅크, 소매금융전환 등 온갖 시나리오만 난무하다가 박근혜정부가 출범하면서 결국 모든 게 원위치되고 말았다. 정권에 따라 춤춘다는 건 산업은행에 대한 청사진이 없다는 뜻이다. 정부는 압축성장 이후에도 산업은행의 역할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행태를 보면 정부는 정책금융기관이 아니라 부실기업을 떠맡아줄 임시주차장을 원하는 게 틀림없다.
정책금융이 필요했다면 정부는 산업은행 CEO에 그 분야 전문가를 임명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명박정부 때까지 한두 번을 제외하곤 언제나 ‘모피아’차지였다. 현 정부 들어선 민간출신(홍기택 이동걸)이 연이어 임명됐지만, 대통령 측근 혹은 캠프출신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인사들이었다. 이들이 산업은행에 무슨 자회사가 있는지나 알까 싶다. 하기야 정부는 산업은행에 낙하산을 투하하면서, 산업은행이 자회사에 낙하산을 내려보는 걸 뭐라 할 수나 있을는지.
대우조선에서 산업은행은 뻔뻔했고, 산업은행 뒤에 숨은 정부는 비겁했다. 산업은행 문제가 산업은행 개혁만으론 해결될 수 없는 까닭이다.
이성철 부국장 sc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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