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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라 마실 권리’ 박탈 당한 시각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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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라 마실 권리’ 박탈 당한 시각장애인

입력
2016.06.23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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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시각장애인 나병택씨가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기 위해 음료수 캔 위쪽의 점자표기를 손 끝으로 확인하고 있다.
1급 시각장애인 나병택씨가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기 위해 음료수 캔 위쪽의 점자표기를 손 끝으로 확인하고 있다.

# 캔커피를 사러 편의점에 들른 김유정(27)씨. 레쓰비, 프렌치카페, 조지아, 칸타타, 티오피, 스타벅스 등등 브랜드만 줄잡아 대여섯개. 거기에 각 브랜드별로 아메리카노, 라떼, 카푸치노, 더블샷 등 종류가 다양하다. 너무 많다보니 김씨는 10분 넘게 이것저것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 1급 시각장애인 나병택(54)씨도 캔커피를 사기 위해 편의점을 찾았다. 캔 위쪽에 표기된점자를 손 끝으로 더듬어 본 뒤 그 중 하나를 집었다. 그런데 마셔보니 오렌지 맛 탄산음료다. 제품 종류는 다양하지만 캔에 표기된 점자는 모두 ‘음료’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나씨에게 음료를 고르는 것은 사치다. 복권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원하는 음료를 마실 수 있기를 빌 뿐이다.

시각장애인들의 상품 선택권이 외면받고 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상품은 점점 늘어나는데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배려는 전혀 개선되고 있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캔 음료ㆍ맥주다. 캔은 종이ㆍ비닐 포장보다 점자 표기가 쉬운데도 불구하고 자세한 제품명 표기 없이 무조건 ‘음료’로만 표기해 시각장애인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편의점에서 판매 중인 캔 음료수 43종(탄산, 이온, 커피, 주스, 에너지 음료) 중 42종이 ‘음료’로만 표기돼 있다. 완제품으로 수입되는 에너지 음료 1종은 이마저도 표시되지 않는다. 상품명은 물론이고 커피, 이온, 탄산조차 구분할 수 없으니 시각장애인들은 나씨처럼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도 오렌지맛 탄산음료를 들이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캔맥주도 마찬가지. 제품 종류는 다양하지만 점자 표기는 모두 ‘맥주’ 로만 돼 있다. 수입 캔맥주 20여종은 아예 점자 표기를 해놓지 않았다. 일본산 수입 캔맥주는 점자 표기가 있지만 일본어인 ‘오사케’로 돼 있어 일본어를 모르는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점자 표기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캔음료에 표기된 점자가 모두 ‘음료’ 한 가지 뿐이어서 시각장애인들이 제품을 고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캔음료에 표기된 점자가 모두 ‘음료’ 한 가지 뿐이어서 시각장애인들이 제품을 고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시각장애인들 사이에 캔음료의 점자 표기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나씨는 “손으로 캔을 만지면 음료인 줄 아는데 굳이 점자로 ‘음료’라고 표시할 필요가 없다”며 “정확하게 제품명과 어떤 음료인지를 점자로 표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설령 판매점에서 도움을 받아 원하는 제품을 구입해도 여러 개를 사면 집에 와서 혼자 제품을 고를 때 난감하다. 나씨는 “혼자 집에서 음료수를 마실 때 엉뚱한 것을 마실까 봐 늘 두렵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캔 용기에 정확한 제품명을 점자로 표기하지 않을까. 가장 큰 이유는 기업들의 배려 부족이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는 “캔 위쪽에 점자 표기 공간이 부족해 제품명을 모두 표시할 수 없어서 ‘음료’로 통일해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은 최소한 ‘탄산’‘이온’ ‘커피’ 등 종류만이라도 구분해 표시해 주기를 원한다. 강완식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홍보팀장은 “점자는 약어도 많기 때문에 기업이 조금만 노력하면 음료수 종류를 충분히 캔 용기에 표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음료수 캔 위쪽에 표기된 점자가 제품에 상관없이 모두 ‘음료’로만 표기돼 있다.
음료수 캔 위쪽에 표기된 점자가 제품에 상관없이 모두 ‘음료’로만 표기돼 있다.

음료수는 그나마 낫다. 건강과 안전에 직결된 의약품의 경우 부족한 점자 표기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약국과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상비약 중 점자 표기 제품은 소화제 2종 뿐이다. 수십년 경력의 약사들조차 점자 표기된 의약품이 어떤 것이 있는 지 제대로 모를 정도다. 강 팀장은 “시각장애인은 대부분 약을 한 번 먹고 버린다”며 “보관할 경우 의약품에 점자 표기가 돼 있지 않아 엉뚱한 약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들은 상황이 이렇다 보니 편의, 안전 문제와 직결된 점자 표기의 법적ㆍ제도적 보장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도로에 설치된 점자 보도블록 등 생활 편의 시설의 경우 ‘장애인 편의증진 보장법’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법’ 등이 있어 법적 설치 근거가 있지만 음료, 의약품 등은 점자 안내를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없다. 강 팀장은 “시각장애인들이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불편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음료, 의약품에 점자 표기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우선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윤은정 기자 yoon@hankookilbo.com

위은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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