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구 보이지 않는 미국 보수
브렉시트 위기 자초한 영국 정치
결국은 정치가 살아야 한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의 대결 구도로 굳어졌다. 클린턴이 본선에서 승리한다면 미국이 여성 참정권을 보장한 지 97년 만에 나오는 첫 여성 대통령이다.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 받는 토머스 제퍼슨조차 지독한 성차별주의자였던 데서 알 수 있듯 여성차별이 뿌리깊었던 미국에서 여성 지도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분명 시대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클린턴의 승리 가능성이 높음에도 미국 정치에서 이런 흥분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클린턴=기득권 세력=낡은 정치’라는 등식이 더 강하게 부각되면서 여성 유권자에게조차 별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이번 대선을 더 강하게 규정하는 것은 아웃사이더의 등장이다. 민주당 버니 샌더스와 공화당의 트럼프다. 둘 다 분노를 정치적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같은 뿌리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방향은 정반대다. 트럼프의 슬로건이 ‘장벽’ ‘추방’ ‘탈퇴’ ‘방임’ ‘파기’ 등이라면, 샌더스의 키워드는 ‘참여’ ‘보편’ ‘개혁’ ‘열정’ ‘변화’다. 기성정치에 대한 반감을 한쪽에서는 분열과 대립으로 이끌어 정략적 공간을 조장하려 하고, 다른 쪽은 현실개혁의 동력으로 삼아 ‘보다 많은 다수가 참여하는 정치’를 꿈꾼다. 이런 점에서 민주당은 경선을 통해 ‘특출한 여성의 탄생’보다 더 큰 수확을 거뒀다. ‘진보의 각성’이다. 그렇다면 보수는?
대선 열풍이 고조되는 와중에 플로리다 올랜도의 동성애자 클럽에서 참혹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아프가니스탄계 무슬림이었다. 9ㆍ11 이후 미국 땅에서 벌어진 최악의 테러사건이다. 그러나 9ㆍ11 당시 미국이 보여줬던 단결은 온데간데 없다. 해법이라고 기껏 총기규제를 들고 나온 민주당 정권도 구태의연하지만, 총기소유에 대한 침해가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테러위협만 부각하는 공화당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무슬림 장벽을 쌓겠다는 트럼프가 더 기세가 등등해진 것은 물론이다. 미국 보수의 비극은 트럼프라는 괴물의 출현에 놀라 시계(視界)가 온통 막혀버린 것과 다름 아니다. 폴 라이언 하원의장,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 등 공화당 핵심들이 나서서 트럼프를 성토하며 유권자의 현명한(?) 선택을 촉구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대서양 건너 영국은 브렉시트 논란으로 나라가 거덜날 지경이다. 탈퇴론자는 유럽연합(EU)이 씌운 굴레를 던지고 영국의 정체성을 찾자고 한다. 반대로 잔류론자는 EU를 떠나면 영국이 지금의 지위마저 잃고 고립만 가중될 것이라고 반박한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쪽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테러가 더 빈번해질 것이라고 하고, 다른 쪽은 경제가 파탄 나고 나라가 쪼개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급기야 브렉시트 찬성 극우파에 의해 잔류를 주장하는 여성 하원의원이 살해되는 사태로까지 치달았다. 그야말로 공포의 마케팅이다. 일이 이렇게 된 시발점은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집권 보수당의 천박함이다.
트럼프 현상과 브렉시트 논란의 밑바닥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공통적으로 깔려 있다. 그 두려움은 브레이크 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트럼프에게서 제대로 된 정강정책 하나 찾아볼 수 없듯이 브렉시트 논쟁에서도 어떻게 하면 국익을 지키면서 유럽과 공존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제 동남권 신공항 입지가 뜻밖에도 김해공장 확장으로 결론 났다. 경남 밀양이나 부산 가덕도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라 믿고 피 터지게 싸웠던 양쪽 주민과 지방관료, 일부 정치인들 입장에서 보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 김해공항 확장이 그나마 최선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밀양과 가덕도를 놓고 벌어진 온갖 분란과 갈등의 후유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쓸데없이 분란을 만들어 나라를 찢어놓은 것도 국책사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무책임한 대선 공약이 원인이다. 정치 부재를 넘어 정치 패악의 시대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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