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제는 삼권분립을 기본으로 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 위에 서 있다. 입법부는 법의 제ㆍ개정 뿐만이 아니라 행정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위해 존재한다. 집권세력은 당ㆍ정ㆍ청의 세 축을 중심으로 권력을 운영하지만, 여당은 입법부의 구성 인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당의 이중적 위상이 당정협의, 당ㆍ청 관계라는 특수한 정권운영 구조와 맞물리면서 청와대는 의제 관철을 위해 국회와 협력과 소통이 아닌 여당에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프레임이 고착화됐다. 또한 이러한 구조는 여야 관계를 건강한 긴장이 아닌 상습적 대립으로 일관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여야 정당들이 지역적, 이념적 편향을 통하여 지지층을 결집하고 대립을 조장함으로써 오히려 정치적 이익을 챙기는 그릇된 정치공학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한국 정치의 구조와 틀을 바꾸지 않는 한 ‘갈등의 조정자’로서의 정치는 기대할 수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한 사회정치적 공감대가 넓어지면서 개헌 논의를 촉발하고 있다. 5년 단임의 대통령제는 ‘87 체제’의 산물이다. 권위주의 정권을 종식시키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했던 87 체제는 그 역할을 다했다. 1987년의 대통령 직선제는 ‘최소한의 민주주의’의 실현이었다. 그 이후 30년 동안 켜켜이 쌓인 적대와 모순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다. 한국사회의 원심력 증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ㆍ경제적 기득권과 사회문화적 권력에도 예상치 못할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위기적 상황이다. 사회적 형평의 지향, 심화되는 사회경제적 격차의 완화, 기본적 인권과 헌법 가치의 실현 등 ‘실질적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한 대장정이 시작되어야 한다. 개헌에는 분권형 대통령제나 내각제 등 권력형태의 변경 못지않게 사회의 모순을 도려낼 헌법적 근거 조항의 제ㆍ개정도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 등에 따른 차별금지도 시대변화에 맞게 보다 적극적으로 확대해야 하며,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조항도 신설 또는 정교하게 다듬어져야 한다.
이념적 성향이나 여야의 구분을 떠나 한국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에 집중돤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인식에는 정치적ㆍ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대통령의 권한이 거의 ‘제왕적’인 현행 대통령제, 소선거구와 단순다수제가 결합한 현행 선거제도에서 사회적 통합과 협치에 대한 기대는 순진하기까지 하고, 기득권자가 모든 것을 갖겠다는 불순함도 배어있는 듯하다. 개헌이 의미를 가지려면 한국 정치의 틀을 바꾸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선거제도의 개선 및 정당, 국회 운영의 틀의 제도화와 함께 논의돼야 한다. 선거와 정당 민주주의의 투 트랙이 건강하지 않을 때 어떠한 권력구조도 시민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여소야대 이후 유난히 협치가 강조되고 있다. 협치란 공동의 참여를 통한 협력정치를 의미하는 수평적 거버넌스의 개념이다. 권력구조의 개편과 선거제도의 개선에 대해 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의 숙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시민의 참여와 동의가 전제되지 않는 개헌 논의는 동력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기존의 틀을 바꾸는 대개혁 작업에는 시민들의 실질적 참여와 심의를 통한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적용될 필요가 있다.
‘다수결의 정치’가 ‘합의의 정치’로 갈 때 협치와 소통이 가능하다. 지금의 구조는 원천적으로 정치권과 시민의 통합과 소통을 저해하고 있다. 개헌 논의가 경제활력을 떨어뜨리고 블랙홀이 된다는 순환 논리는 기실 정권의 레임덕에 대한 우려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지금이 발상을 바꿀 적기(適期)다.
최창렬 용인대 중앙도서관장ㆍ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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