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는 어디까지나 생기발랄한 중립적 야인이어야 한다. […] 변호사의 직업이란 억울한 사람의 편이 되는 것이다. […] 권세에 굴하지 않고 돈에 팔리지 아니하고 어디까지나 정의를 위하여 불의에 대립하여 투쟁하는 기백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대한변협 회장을 두 차례 역임한 고 이병린 변호사의 수필집 ‘법 속에서 인간 속에서’(청구출판사ㆍ1967)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병린 변호사는 제3공화국 공화당 정권의 비상계엄령에 맞서다 두 번이나 구속됐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정면대결 하여 법조인의 기개를 지킨 변호사였다. 홍성우 변호사의 평(評)처럼 “그는 시종일관 재야법조인으로서 법치주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항상 깨끗한 생활을 솔선수범했다.”(2011. 6. 6. 주간조선)
한국 변호사들의 DNA 속에는 이런 선배 변호사들의 야인적 기질, 시민과의 연대의식이 이어져 내려왔다. 그렇기 때문에 구 변호사윤리장전은 “변호사는 권세에 아첨하지 아니하고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며 항상 공명정대하여야 한다”는 기본윤리와 “변호사는 국민에 대한 봉사자이므로 보수가 부당한 축재의 수단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원칙을 두었다.
이것은 특히 형사절차에서 강하게 요구된다. 국가형벌권의 행사 과정에서 시민이 국가와 대등한 당사자로 활동하는 걸 가능케 하는 장치가 바로 변호사 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은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는 체포ㆍ구속이나 처벌ㆍ보안처분에 관하여 적법절차와 영장주의 원칙에 따라 여러 절차적 권리를 보장하고, 이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변호사 제도는 이렇게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보장된 피의자ㆍ피고인의 방어권과 각종 절차적 권리를 실질적ㆍ효과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법적 장치이다. 그리하여 변호사는 개인적 이익이나 영리를 추구하는 단순한 직업인이 아니라, 법치주의 실현의 한 축으로서 정의와 인권을 수호하는 공적인 직위에 있다(대판 2015. 7. 23, 2015다200111).
위와 같은 한국 변호사의 전통과 형사절차에서 변호사의 직무를 고려할 때, 선임계 없이 이루어지는 변론활동(소위 전화변론, 몰래변론)의 규제 방안에 대한 일부 변호사들의 반발은 실망스럽다. 6월 13일자 법률신문은 대형 로펌의 변호사와 검사장 출신 변호사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변호사가 검사와 접촉해 사건 내용을 파악한 후에 수임 여부를 결정하는 것까지 부당하다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달리 해석하면 변호사가 의뢰인의 말과 자료보다는 그와 대립 관계에 있는 검사의 진술에 의존하여 사건을 파악한다는 뜻이다. 이는 선배들이 물려준 변호사의 야인적 기질을 후배들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변호사가 검찰의 조력자가 아니라 대립적 지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검사의 시각에서 사건을 평가하고 수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예정한 변호사 제도의 취지에도 위반된다.
변호사 윤리의 관점에서도 이 반론은 맞지 않다. 변호사법과 변호사윤리장전은 이미 선임계를 제출하지 않고는 전화, 문서, 방문, 기타 어떠한 방법으로도 변론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형사처벌 대상은 아니지만 이를 위반한 변론활동은 변호사의 징계사유다. 결국 반론을 편 변호사들은 변호사 윤리 규범을 위반하며 변론활동을 했다는 것인데 다른 때도 아니고 2명의 전관 변호사가 드러낸 법조계의 치부로 어수선한 요즈음에 이런 엉뚱한 주장이 나오는 게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그 점에서 지금 법조계가 겪는 윤리적 혼란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며 그것이 변호사로서의 자긍심을 잃어가는 재야 법조의 자업자득이자 변호사로서의 윤리의식 결여가 빚은 필연적 결과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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