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이후 현재까지의 코트테일 이펙트도 적지 않은 수준이지만, 19세기 선거에서는 그 효과가 훨씬 더 컸다. 미국에서 비밀선거 제도가 20세기 초에 들어서야 비로소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건국 초반 미국에서는 투표 시 종이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말로 했다. 그러다 점차 정당이나 후보자가 직접 투표용지를 인쇄해서 유권자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당 별로 용지 모양과 색깔이 달랐으며, 한 정당의 용지에는 그 정당의 후보들에 대한 정보만 있었다. 투표를 하려면 그것을 들고 투표소 내 각 정당의 테이블로 가서 직접 제출해야 했다. 누가 누구에게 투표하는지 모두가 알 수 있는, 이른바 공개투표였던 것이다. 그 당시 많은 유럽 출신 이민자에게 직장과 물질적 혜택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표를 제공받는 식의 정당조직(party machine)이 유지되었던 탓이 컸다.
따라서 유권자들은 분할투표를 거의 할 수 없었으며, 대통령 후보에 대한 선호에 따라 선택된 투표용지에 있는 같은 정당 후보들은 대개 그냥 따라오는 표였다. 자연히 대선 후보와 기타 다른 후보들이 운명을 같이 할 수 밖에 없었다. 코트테일 이펙트는 매우 큰 편이었다.
그러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있었던 ‘혁신주의 개혁’(Progressive Reform)의 여파에 대다수 주 정부가 비밀선거 제도를 도입하고 정부에서 ‘직접 투표용지’(Australian ballot system)를 인쇄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있었던 선거권 확대 운동과 더불어 이것은 미국의 선거제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고, 유권자들의 선택 폭을 넓히며 부차적으로 코트테일 이펙트를 줄이는 효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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