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손예진(34)이 낯설어졌다. 익숙한 그의 얼굴이 뜻밖의 생경함으로 다가오는 순간, 그 엄청난 간극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나에게도 저런 얼굴이 있었던가?” 손예진도 스크린 속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봤다. 손예진의 필모그래피에서 영화 ‘비밀은 없다’(23일 개봉)를 따로 떼어내 ‘또 다른 손예진’의 ‘또 다른 필모그래피’로 다시 기록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알던 손예진은 이 영화엔 없으니 말이다.
‘비밀은 없다’는 남부러울 것 없이 완벽했던 정치인 부부가 중학생 딸의 실종 이후 가족 안의 충격적 진실에 맞닥뜨리는 이야기를 그린다. 남편 종찬(김주혁)은 딸이 사라졌는데도 선거에만 몰두하고,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아내 연홍(손예진)은 홀로 딸의 흔적을 쫓는다.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가면서 점점 일그러져가는 연홍의 비이성적인 모습을 손예진은 새로운 성질의 모성으로 해석했다. 그에 맞춰 연기 스타일도 달리했다. 울부짖지 않아도 연홍의 집착과 광기가 고스란히 관객을 덮쳐온다. 전형적이지 않은 연기에 설득되는 건 관객 입장에서도 꽤 특별한 감흥이다.
“캐릭터엔 어쩔 수 없이 배우의 실제 모습이 녹아들게 돼요. 하지만 연홍에겐 제 것이 거의 담기지 않았어요. 연기적 측면에서 새로운 경험이었죠. 시종일관 감정을 이끌어나가야 해서 힘들기도 했지만, 이 영화 덕분에 매너리즘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제게 자유를 준 작품인 것 같아요.”
경험을 통해 시야가 넓어지면 예전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손예진은 “‘비밀은 없다’ 촬영 이후 열정과 자신감이 생겼다”며 “앞으로 어떤 작품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힘주어 말했다.
‘비밀은 없다’를 선택한 것도 새로움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비밀은 없다’는 ‘미쓰 홍당무’(2008)로 비범한 작품세계를 보여줬던 이경미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손예진은 “시나리오를 읽으며 어떤 영화로 탄생할지 너무나 궁금했다”며 “관객으로서 한번쯤 보고 싶은 영화였다”고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줄곧 그래왔다.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만이 손예진의 선택을 받았다. 영화 ‘연애소설’(2002), ‘클래식’(2003), ‘내 머릿속의 지우개’(2004), ‘아내가 결혼했다’(2008) 등을 통해 멜로퀸으로 불리던 그가 최근 몇 년 간 ‘타워’(2012), ‘공범’(2013),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등으로 장르와 캐릭터의 변화를 시도한 것도 마음을 따른 결과다. “앞으로도 매력이 없는 캐릭터는 선택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앗, 호러물도요. 호러는 정말 자신 없어요. 연기할 때조차 무서울 것 같아요(웃음).”
변화무쌍한 손예진의 필모그래피는 앞으로 얼마나 더 다채로워질까. 물론 호러물은 추가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올해로 연기 데뷔 15년. 배우의 시간은 스크린에 기록된다. 손예진은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설레며 기다리고 있다. “요즘에 (tvN)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를 열심히 보고 있어요. 선배님들의 연기가 정말 놀라워요. 눈빛에 묻어나는 연륜과 경험은 제가 어떻게 해도 따라갈 수 없겠더라고요. 저도 선배님들의 나이가 되면 저런 연기를 할 수 있겠죠? 그건 너무나 멋진 일 같아요.”
‘디어 마이 프렌즈’의 나이든 친구들처럼 손예진에게도 함께 늙어갈 좋은 친구들이 곁에 있다. 송윤아, 설경구, 엄지원, 공효진을 떠올리며 손예진이 사랑스러운 반달 눈웃음을 지었다. “나이 들어서도 ‘누구누구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계속 만나자”며 의기투합한 동료들이라고 했다. “한참 후에 그분들과 ‘디어 마이 프렌즈’의 속편을 찍어도 좋겠다”는 얘기를 건네니 손예진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그날이 온다면 제 연기에도 세월이 담기겠죠? 깊어진 주름만큼 연기도 더 깊어졌으면 좋겠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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