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노동자의 수치심은 유서 깊은 감정이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걷지 않으면 사유는 잠 들어 버린다”며 방구석에 박힌 현대인에게 걷기를 촉구했고, 오스트리아 소설가 잉에보르크 바흐만은 자신의 노동을 “직업으로 인정해달라고 사회에 요구할 수 없는 일”이라며 사지를 움직이지 않는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마이클 폴란은 집을 지었다.
미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논픽션 작가 중 한 명인 폴란은 ‘잡식 동물의 딜레마’ ‘욕망하는 식물’ 등이 번역돼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주말 집 짓기’(펜연필독약 발행ㆍ배경린 옮김)는 그가 아내와 함께 사는 집 근처에 직접 지은 오두막에 대한 기록이다. 폴란은 집 짓기라는 과격한 노동을 결심한 동력을 설명하며 “격한 질투심”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건축가들은 이상과 현실의 경계지대에서 일하며 아이디어의 조각들을 실제 구현 가능한 형태의 것으로 번역해 내고, 또 목수들은 뛰어난 손재주로 현실 속에 유형의 산물을 더한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속에서만 겨우 통하는 창작물을 만드는 작가들에게 있어, 이런 물적 형태의 창출은 격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의 시간을 컴퓨터 스크린 앞에 앉아 바깥 자연 세계와는 동떨어진 채 일하고 있는 나의 추상적인 삶에 말하자면 해독제가 절실했다.”
질투에 사로 잡힌 지식인이 소매를 걷어 붙였으니, 이제 남은 일은 팝콘을 먹으며 그의 실패를 구경하는 일이다. 심술 궂은 독자의 기대대로, 폴란은 그의 아내로부터 “유니콘보다 쓸모 없다”는 핀잔을 들을 만큼 지독히 손재주가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진짜 관전 포인트는 따로 있다. 글로 세상을 배운 자의 몽상적 취향이 나무와 시멘트와 못 같은 유형의 산물 앞에서 ‘쓰잘데기 없는 것’으로 판정 받는 순간, 이 책의 가장 큰 즐거움은 그 순간을 기다리는 데 있다. 폴란이 설계를 도와준 건축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꼭 필요한 것만 놓을 수 있는 크기면 돼. 단순한 용도에, 깔끔하면서도 모든 것이 잘 정돈된 곳. 내부는 방이라 하기에도 조금 단출한 느낌이 들도록 하고 싶어. 방 자체가 하나의 가구인 것처럼, 혹은 요트의 조종실처럼 작지만 잘 짜인 느낌으로 말이지.” 그는 온갖 모순된 요구로 점철된 편지 끝에 이렇게 덧붙인다. “잊지마. 바보 멍청이도 만들 수 있을 만큼 간단해야 한다고.”
예상대로 건축 과정은 험난했다. 하루 종일 후면 기둥을 세우고 바닥보를 기둥의 홈에 연결하는 데 체력을 소진했지만, 결과물은 사각형에서 벗어나 심하게 비뚤어진 건물이었다. 폴란은 함께 일하는 목수에게 해체주의 건축 이론 중 수직과 평행을 일부러 어기는 것도 있다고 ‘썰’을 풀지만 돌아오는 건 “웬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나 하는 표정”뿐. 결국 건축가 친구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다시 못질을 하고 목수의 잔소리를 견디며 땀을 흘린 결과 2년 반 만에 오두막이 완성됐다.
책으로 둘러싸인 두꺼운 벽이 단열재 역할을 하고 8월 오후 창문을 모두 열면 닫힌 공간이 순식간에 차양 달린 툇마루로 변하는 그 집에서, 폴란은 10년 간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글을 썼다. 2003년 캘리포니아를 떠나면서 그는 오두막을 해체해 가져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그 집이 그곳에 있을 때만 가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집을 양도한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 글을 쓸 때면 폴란은 여전히 그 좁은 오두막, 커다란 물푸레나무 책상 앞에 앉는다고 한다. 가장 행복했던 몽상의 장소. 결국 몽상은 불치병인 것이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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