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문학동네)와 정지돈 ‘내가 싸우듯이’(문학과지성사). 두 젊은 작가의 책이 나란히 출간됐다. 작가가 둘 다 30대라는 것, 소설집이라는 것, 거기 수록된 작품들이 최근 2~3년 간 유력 문학상들을 휩쓸었다는 것 외, 두 책은 완전히 다른 지점에 서서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잊어버린 것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하여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조중균씨는 이른바 ‘마이너’다. 출판사 편집자로 입사했다가 윗사람에게 밉보여 교정업무로 밀려난 그에겐 직함도 없다. 밉보인 이유는 점심식사 때문으로 추정된다. 구내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대가로 그만큼의 돈, 한 달에 9만6,000원을 돌려달라는 그의 요구에 윗분들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고 본부장은 그에게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것인지를 묻는다. 조중균씨는 수첩에 ‘나는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쓴 뒤 본부장의 서명을 받기 위해 매일 식당 정수기 옆에 서서 기다린다. “조중균씨는 융화가 안 돼. 문제가 많거든, 자기 세계가 너무 강하거든.”
출판사 인턴으로 들어온 영주와 해란은 어느 날 조중균씨의 친구로부터 그의 대학시절 일화를 듣게 된다. 데모가 한창이던 시절, 소위 ‘수구꼴통’이던 교수가 이상한 시험문제를 낸다. 이름만 쓰면 통과, 그 외에 다른 내용을 쓰면 낙제. 텅 빈 문제지 앞에서 조중균은 고민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점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세상인지. 그는 시험지 위에 이름 대신 시를 쓰고 유급을 한 뒤 군대에 간다. 그의 시 ‘지나간 세계’는 데모 현장마다 구호처럼 낭송된다.
‘조중균의 세계’는 주인공의 해고로 끝난다. 이념의 시대엔 잠시나마 영웅이었는지 몰라도 지금 조중균의 세계는 지나간 세계다.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에 단단히 뿌리내릴수록 거추장스러운 인간, 요령 없는 인간, 불필요한 인간이 될 뿐이다. 작가는 잊지 말아야 할 것까지 서둘러 잊어버리는 우리 사회를, 입술을 꼭 깨문 채 응시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작가들은 우리가 간과하고 넘어갔던 이 사회의 악함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 스무 살이었던 시점으로 자꾸 불려가는데요, 그때 ‘IMF 사태’가 터졌고 사회에 첫 걸음을 디디는 아이들은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했어요. 이제 기성세대가 된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의 모습이 되었는지, 자본의 위협 앞에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지가 제 소설의 고민입니다.”
잊혀져야 할 것들, 잊고 넘어서야 할 것들에 대하여
정지돈 ‘내가 싸우듯이’
2003년 허물어진 명동의 중국대사관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둘째 아들이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돌아와 설계한 것이다. 그는 훗날 새서울백지계획이라는 서울시 도시계획에 대해 언론으로부터 제언 요청을 받는데 그 계획의 골자는 도시 내부 구성에 관한 것이 아닌 도시 외곽선을 무궁화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제언 요청을 받은 건축가 중에는 김중업도 있었는데, 필화 사건으로 프랑스로 망명한 그를 주인공으로 한 기록영화 ‘김중업’을 세계적인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가 찍었다.
이 거짓말 같은 말들 가운데 정말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전부 사실이다. 혹시 나만 몰랐을까 봐 눈치 보며 검색하게 되는 사실이다.
정지돈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소설이냐 논픽션이냐는 논쟁 속에서 2015년 젊은 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실제 있었던 일을 뚝뚝 떼어내 조합, 소설이라 내민 작가를 향해 할 수 있는 첫 질문은 “뭐 하자는 거냐”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은 “불만이 뭐냐”다. 그의 ‘불만’은 수록된 다른 소설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작처럼 이어지는 ‘눈 먼 부엉이’‘창백한 말’‘미래의 책’에서는 세계 각국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 독자들이 등장해 문학에 관해 저마다 개똥철학을 펼친다. “당신이 문학에서 원하는 것은 열광입니까” “문학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나요”
이 질문들은 지금, 여기로 옮겨진다. 한국소설을 찾는 이가 줄고, 출판사는 한숨 쉬고, 언론은 책 좀 읽으라며 독자를 꾸짖고, 독자는 재미없으니까 안 읽는다고 대거리하는, 이 오래된 싸움판에서 작가의 태도는 단호하다. “인류의 보편가치 중 문학만이 지킬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 “문자와 언어는 영원하겠지만 그게 꼭 책과 문학을 통해서만 연명할 이유는 없죠. 종이책은 필름처럼, 문학은 클래식처럼 남을 겁니다. 여기다 대고 클래식이 다시 예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든가, 클래식 연주자들에게 크로스오버를 통해 대중성을 확보하라고 촉구하는 게 지금 몇몇 비평가들이 하고 있는 일이에요.”
르포와 논문에서 따온 비문학의 언어, 인과로부터 해방된 파편적 글쓰기. 정지돈의 소설은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의 문학을 떠올리게 하지만 정작 그는 문학의 미래를 예고하지 않는다. “20세기에 디드로, 플로베르 등이 이미 시도했던 겁니다. 다만 이어지지 않았고 실패한 혁명으로 끝났죠. 저는 한때 문학의 미래가 될 뻔 했던 이것들에 개인적으로 매혹됐을 뿐이지 이게 한국문학의 방향성이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럼 미래는 어디 있을까. “모르죠. 문학은 고유의 자리를 잃었고, 그럼에도 남아 있는 자들은 각자 추구하는 길이 뚜렷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을 ‘실험성’과 ‘진정성’으로 양분된 지난 시대의 프레임 안에 가두는 거야말로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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