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에 도전하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게 이른바 ‘이메일 스캔들’은 대권 가도의 가장 치명적 위협이다. 그러나 언론에게는 다르다. 법원 명령에 따라 미 국무부가 공개한 재임 기간(2009~2013년) 이메일은 한미관계를 포함, 미국 외교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국무부가 공개한 3만여건 이메일 중에는 재임 2년째로 접어드는 2010년 1월 조셉 나이 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학장이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도 들어 있다. 미국의 손꼽히는 동아시아 전문가인 나이 전 학장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이곳 도쿄에서 살펴 보니, 미일 관계가 심각한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오키나와 기지 이전 문제 때문에 동맹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일본 정부는 대등한 미일 관계를 원하고 있다. 또 중국과는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한편으로는 (미국이 배제된) 동아시아 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일부 워싱턴 당국자들이 일본에 강경하게 대응하려는 유혹을 받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일본에 꾸준히 전략적 접근을 해야 한다.” 이 칼럼은 당시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이던 앤마리 슬로터 프린스턴대 교수를 통해, ‘정책 결정에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클린턴 전 장관에게 전달됐다.
나이 전 학장의 조언이 클린턴이 이끄는 미 국무부의 대일 정책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알 수 없다. 기자가 주목하는 것은 불과 6년전 상황이 지금의 미일 관계와는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나이 전 학장이 걱정할 정도로 미일 관계가 악화한 2010년 일본은 민주당 집권시절이다. ▦아동 수당지급 ▦고속도로 무료화 등 포퓰리즘 공약을 내걸고 집권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 由紀夫) 총리는 오키나와 현의 미군 후텐마 기지 이전합의를 백지화하겠다고 공언해 대미 관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6년 전 클린턴 이메일에 투영된 미일 갈등은 최근 2, 3년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보여준 친일(親日) 행보의 배경을 짐작케 한다. ‘오키나와에서 미군 기지를 몰아내고 중국과 친하게 지내겠다’는 하토야마를 겪고 난 오바마 대통령에게 ‘있는 힘을 다해 미국과 함께 중국을 막아 내겠다’는 아베 신조(安倍 晋三) 현 총리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한국 정부에게 일본과의 과거사 갈등을 적당히 마무리하도록 주문하고, 일본 총리로는 전후 최초로 아베의 미 의회 합동연설을 주선하고, 손수 히로시마를 방문해 전범국 이미지를 희석시켜 준 것은 아베 총리의 친미 정책에 대한 보답인 셈이다.
요즘 미 국무부는 언론 브리핑 동영상 훼손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3년전 브리핑에서 ‘미국 정부가 국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젠 사키(현 백악관 공보담당관) 당시 대변인이 ‘그렇다’고 말한 장면이 슬며시 삭제된 게 들통난 것이다. 국무부는 처음에는 ‘기술적 실수’로 삭제됐다고 거짓 해명했다가, 언론의 추궁이 계속되자 확인되지 않는 누군가의 지시로 삭제됐다고 말을 바꾼 상태다.
동영상 파동이 보여주듯, 겉으로는 투명한 정책과 인권외교를 외치는 미국도 국익을 위해서는 둿거래도 하고 필요하면 거짓말도 한다. 외교는 국익을 관철시켜야 하는 현실이고,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국익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016년 미ㆍ중 전략경제대화가 최근 끝났다. 미국의 거친 공세로 중국이 경제부문에서 양보했지만, 한반도 정책에서는 팽팽한 대립을 보였다. 클린턴 전 장관의 이메일, 젠 사키 담당관의 솔직한 실언은 미ㆍ중 틈바구니에서 정신차리지 않으면 큰일 날 수 밖에 없는 한국 외교의 냉엄한 현실을 보여준다. 조철환ㆍ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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