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우연히 죽을 지 모른다.” “잠재적 가해자가 되신 것이 기분 나쁜가요? 저희는 잠재적 피해자가 되는 게 두려워요.” “딸을 ‘단속’하지 말고 아들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가 ‘혐오할 권리’는 아닙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운’이 좋아 살아남았습니다.” “당신은 나였고 당신의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지난달 17일 새벽 1시 서울 강남역 공용화장실에서 23세 여성이 흉기에 찔려 숨진 사건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에 나붙기 시작했던 포스트잇 속의 글귀들이다. 이 글귀 1004개를 고스란히 모은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이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포스팅된 순서대로 1번에서 1004번까지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채록해둔 기록물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속에서만 맴돌던 이런저런 주장과 목소리들이 공개된 장소로 뛰쳐나온 기록물이기도 하다.
포스트잇 사연은 충격, 경악, 분노, 사죄 등 저마다 다양하다. 남성으로 보이는 이들이 미안하다고 쓴 내용도 더러 눈에 띈다. 해제를 쓴 여성학자 정희진은 정작 이 사건 자체의 충격성이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 더 충격적이라는 점을 꼬집었다. “기득권, 주류, 중심주의 세계관에 익숙한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은 한국 사회의 일부분”으로 그동안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었다는 얘기다.
‘혐오라는 표현은 과격하다’, ‘차분하게 해결해 나가자’라는 얘기에 대해서도 남성들 스스로는 “폭력과 살해,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일상 문화에 젖어 있으면서도 ‘혐오’가 과격한가” 되묻는다. 또 여성들의 단합에 대해서도 “남성연대는 권력행위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답했다.
책을 만들어낸 출판사 나무연필은 “포스트잇에 자신의 의견을 남겨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일일이 출간 허락을 받지 못한 점도 양해를 바란다”면서 “사회적 공론화에 유의미하다는 판단 아래 단행본 작업을 진행한 만큼 앞으로 관련 자료 수집이나 연구에 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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