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한 달간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과 구의역에서는 포스트잇 추모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지난달 17일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 직후 사건 발생장소에서 가까운 강남역 10번출구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여성들의 포스트잇과 국화꽃이 놓이기 시작했다. 열흘 만인 지난 28일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정비를 하던 청년이 사망하자 역시 사고 장소에 추모의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전에도 수많은 살인사건과 산업재해 사망사고가 있었지만 이 두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달랐다. 자신도 겪을 수 있었다는 데 공감했고, 희생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이 같은 죽음을 불러 온 사회에 대한 분노를 포스트잇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달했다. 포스트잇이라는 새로운 도구의 등장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다양한 기사와 칼럼을 통해 정리해 본다.
강남역과 구의역 포스트잇 모두 “네 탓이 아니야”
강남역 살인사건과 구의역 사망사고 이후 시민들의 반응 중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기존에 관성적으로 반복돼 온 ‘희생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서사를 강력하게 거부했다는 데에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는 유사 사례에서 흔히 나오던 ‘왜 조심하지 않고 밤 늦게까지 여자가 술을 마시고 다니냐’라는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았다. 구의역 사망사고에서는 사고 초기 서울 메트로는 ‘용역 업체가 관련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혔다가 거센 비판을 받고 사고에 대한 총체적 책임을 인정해야 했다. (기사보기☞ 서울메트로 구의역 사고 책임인정)
또한 이들의 죽음이 ‘나의 일’이 될 수도 있었다는 인식은 강력한 공감대를 만들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사회 전반에 퍼진 여성혐오의 타겟이 또다른 여성인 내가 될 수 있음을, 구의역 사망사고는 누구나 외주화된 노동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나라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는데, 세월호부터 해서 우리 사회의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사건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더 이상 사람이 이렇게 억울하게 죽지 않으면 좋겠다. 남편이 비슷한 일을 하다 보니 항상 불안하다. 남일 같지가 않다.”이소영(30·회사원)
(기사보기☞ [구의역 메모붙인 시민들 인터뷰] “이 구조 자체가 누가 죽어갈지 모르는 구조…미안하다”)
“너는 나일 수도 있었다고, 너의 죽음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을 징후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의 곪은 부분을 알고 치유하려는 자기 면역 체계의 작동. 문제는 이러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갈등 상황을 치유해야 하는 주체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결국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허무함이 남을까. 혹은 목소리를 내면 변하는 것이 있다는 신뢰가 남을까.”
(기사보기☞ [2030 세상보기] 2호선)
우리시대 공감의 연결, ‘포스트잇’
전문가들은 강남역과 구의역에서 모두 포스트잇을 통해 추모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공감의 연결효과’를 찾기도 했다. 또 인터넷에서 젊은 세대의 소통 수단인 SNS처럼 오프라인 공간에서 자유롭고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는 포스트잇의 특성에 주목하기도 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공감의 연결효과’로 봤다. 김 교수는 “포스트잇에 메시지를 담아 소통하고, 다른 사람들이 공감해주길 바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꽃다운 나이의 여성, 스무 번째 생일을 앞둔 비정규직 근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슬퍼하는 동시에 누구나 그들처럼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공감이 포스트잇을 남기는 행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포스트잇은 자유롭고 유연함을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SNS와 닮았다”고 했다. 젊은 세대가 슬픔과 아픔을 공유하는 수단으로 SNS에 글이나 사진을 남기고 공유하듯 비슷한 성격을 지닌 포스트잇이 추모에 활용된다는 설명이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포스트잇은 SNS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사회문제에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SNS가 발달하면서 감정을 묵혀두지 않고 쉽게 표현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고, 이런 문화가 포스트잇과 연결되면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추모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기사보기☞ 소리 없는 분노… 공감의 연결)
포스트잇 추모 이후… “침묵하지 않겠다”
‘강남역’과 ‘구의역’은 포스트잇 추모로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건 후 SNS에는 ‘강남역 10번출구’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페이지가 만들어져 추모 이후에도 침묵행진과 밤길걷기 행사, 관련 학회 소식과 유사 사례에 대한 문제제기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구의역 사망사고 이후 만들어진 ‘구의역 스크린도어 9-4 승강장’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세월호 유가족들의 사고현장 방문이나 메틸알코올 중독 실명 피해 노동자의 추모글 등을 전하며 이 사고가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의 외주화’의 숱한 사례 중 하나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사회 없는 사회’를 더 이상 이렇게 놓아둘 순 없다. 사회는 약육강식의 사냥터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다. 공동체로서의 사회를 일궈나가기 위해선 전국적 차원이든 지역적 차원이든 정부와 국회 또는 의회가 약자 보호라는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양성평등을 이룰 수 있는 제도적·문화적 혁신을 서두르고,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의 외주화를 철저히 금지시켜야 한다.”
(기사보기☞ [김호기의 원근법] 안타까운 두 죽음과 ‘사회 없는 사회’)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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