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8일부터 TV채널을 돌리다 보면 낯선 장면에 깜짝 놀랄 수 있다. 검은 배경의 정지화면에 방송중단 고지가 뜨는 장면이다. 이 방송사는 대부분 지역에서 20번 이내의 황금 채널을 차지하고 있는 롯데홈쇼핑이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지난달 27일 롯데홈쇼핑에 대해 9월28일부터 6개월간 매일 오전·오후 8∼11시 6시간씩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다.(▶기사보기) 이 시간대는 홈쇼핑의 프라임타임(황금시간)으로 불린다. 지난해 재승인 심사 과정에서 롯데홈쇼핑이 비리 임원을 고의로 누락해 감사원에 적발됐다는 이유다.
방송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초강력 징계’다. 판매량(취급고) 감소액이 5,500억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등 롯데홈쇼핑은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몰린 모양새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반대다. 사실 롯데홈쇼핑은 지난해 5월 아예 회사 간판을 내릴 뻔했다. ‘중징계를 받았다’기 보다는 ‘최악의 징계를 면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기: 2014년 ‘전설의 갑질’ 사건
“이혼한 전처에게 매달 300만원을 보내라”
“아버지가 진 도박 빚 1억5,000만원을 대신 갚아라”
“투자한 주식이 떨어졌으니 비싼 값(4,000만원)에 사달라”
“2,800만원짜리 그랜저 차를 사달라”
롯데홈쇼핑 임직원들이 납품업체에 했던 요구사항들이다. ‘전설의 갑질’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2년 전 롯데홈쇼핑 전ㆍ현직 임직원 등 23명이 무더기로 검찰에 기소된다. (▶기사보기)
당시 사건의 파장은 상당했다. 홈쇼핑 방송 출연이나 황금시간대 편성 등을 대가로 ‘슈퍼 갑질’을 일삼아 온 유통업체들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검이 이 사건의 수사를 첨단범죄수사부에 배당했을 정도로 롯데홈쇼핑 임직원들의 수법은 교묘하고 기상천외했다. 한 직원은 몰래 돈을 챙기기 위해 내연녀의 남동생 계좌로 돈을 받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건을 추적하다 보니 배후에 최고경영자(CEO)가 있었다는 점이다. 신 헌 롯데홈쇼핑 전 대표는 비자금 중 2억2,600여만원을 상납 받아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 직접 뒷돈을 수수하기도 했고 2,000만원에 달하는 이활종 화백의 그림 1점을 받기도 했다.
결국 신 전 대표는 구속 기소돼 징역 2년과 추징금 8,800만원을 선고 받았고, 나머지 전ㆍ현직 임원도 모두 유죄를 선고 받았다. (▶기사보기)
■승: 누가 봐도 “퇴출 1순위”
이 사건이 터진 것은 5년 주기로 진행되는 TV홈쇼핑사들의 재승인 심사(2015년 5월)를 불과 1년 앞둔 시점이었다. 재승인 심사란 공공재인 전파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공공성을 준수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사실 롯데홈쇼핑의 비리는 공공성이 부족한 정도가 아닌 설립취지를 무색케 하는 사건이었다. TV홈쇼핑은 1995년 “중소기업의 판로를 개척해준다”를 명목으로 설립이 허가된 업종이다. 더구나 롯데홈쇼핑은 원래 중기전용 홈쇼핑이었던 우리홈쇼핑을 2006년 롯데가 인수한 것이다. 이번만큼은 쉽게 넘어가기 힘들 것이란 전망에 무게가 쏠렸다.
미래부도 이런 분위기에 힘을 실었다.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2014년 6월 오용수 미래창조과학부 방송산업정책과 과장은 브리핑을 통해 “납품비리 등 공공성과 공정성을 저해한 홈쇼핑 채널에 대해 재승인 심사 시 불이익을 주는 방침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해 11월 공개된 이 방안은 홈쇼핑 업체의 비리를 평가할 수 있는 2번 항목(공적책임과 공정성, 공익성 실현 가능성)의 배점을 150점에서 200점으로 올리고 100점 이상을 얻지 못하면 탈락된다는 ‘과락제’를 도입한 것이 핵심이었다. 누가 봐도 롯데홈쇼핑을 겨냥한 조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롯데홈쇼핑은 지난해 3월 또 한번의 비리 사건에 휘말린다. TV홈쇼핑 6개사가 납품업체에 ‘갑질 횡포’를 한 사건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돼 143억6,800만원의 과징금을 받은 것이다.(▶기사보기) 롯데홈쇼핑은 홈쇼핑 업체 중 가장 많은 6개 항목을 위반해 37억원의 과징금을 받았다.
■전: 2015년 ‘기막힌 반전’
하지만 재승인 심사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미래부는 지난해 4월 말 롯데홈쇼핑과 현대홈쇼핑, NS홈쇼핑 대해 재승인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현대홈쇼핑은 1,000점 만점에 746.81점, NS홈쇼핑은 718.96점, 롯데홈쇼핑은 672.12점을 획득해 승인 최저점수(650점) 이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다만 미래부는 롯데홈쇼핑에 대해서는 재승인 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는 ‘조건부 승인’을 결정했다. 회사 대표가 구속될 정도의 대형 비리가 적발됐는데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셈이다.
여론은 당연히 의문을 제기했다. 미래부를 향한 롯데의 ‘구애작전’이 통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었다. 재승인 심사가 다가오자 롯데는 신동빈 그룹 회장까지 직접 나서 50억원 규모의 상생 기금을 마련하는 등 이미지 쇄신에 열을 올렸다.
게다가 미래부는 당초 발표 예정일보다 한달 앞당겨 채널 재승인을 급히 발표해 ‘꼼수’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는 식약처의 백수오 재검사 발표에 언론의 눈과 귀가 쏠려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논란이 불거지자 재승인 발표 한달 만에 감사원은 사업 승인을 내주는 과정과 절차가 적절했는지에 대한 전격적인 감사에 착수한다.
■결: 2016년 ‘딱 걸린 꼼수’
지난 2월 발표된 감사 결과는 놀라웠다. 감사원은 롯데홈쇼핑이 재승인 심사용 서류를 제출할 때 2014년 적발된 비리 임원 10명 중 대표이사 등 2명을 누락시켰고, 이 사실을 미래부 공무원들이 묵인해준 사실을 찾아냈다.
감사원에 따르면 롯데홈쇼핑이 서류를 누락시킨 것은 ▦비리 행위 대부분이 2010년 이전에 이뤄졌거나 ▦2012년 이미 퇴직한 사람이라는 이유였다. 이는 서류 제출 원칙을 몰랐거나 알고도 묵인한 것이었다.
뒤늦게 서류 누락을 일부 확인한 미래부는 추가 제출을 요구했지만, 롯데는 신 전 대표의 배임수재 해당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주장을 제출했다. 그러자 미래부는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조차 않은 채 열흘 뒤 재승인 결과를 서둘러 발표했다.
감사원은 2명의 범죄 사실까지 심사에 반영됐다면 2번 항목의 총점이 102.78점에서 94.78점으로 떨어져 과락(100점 이하)에 해당돼 재승인을 받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특히 미래부가 전체 심사 가운데 유독 이 대목에 대해서만 별도 확인을 하지 않고 업체의 제출 자료에만 의존했다는 점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홈쇼핑 비리를 근절하겠다며 배점을 늘리는 등 자신들이 심사를 강화하겠다고 밝힌 항목에 대해 오히려 부실 심사를 한 것이다.
정상적인 심사가 이뤄졌다면 롯데홈쇼핑은 지난해 5월 퇴출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롯데홈쇼핑은 폐업을 면하고 제한적인 영업정지 조치를 통해 2년(다음 재심사 기간)의 생명 연장에 성공했다.
그런데 오히려 롯데홈쇼핑은 미래부의 영업정지에 대해 “협력업체들의 막대한 피해가 우려된다”며 행정소송 등 법적 대응까지 검토하고 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중소 납품업체들이 롯데홈쇼핑의 불법행위 때문에 피해를 본다면 반드시 후속 대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슈퍼 갑질’을 일삼아온 롯데가 이제 와서 ‘협력업체 수호자’를 자처하는 것은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는 격’이 아닐 수 없다.
홈쇼핑 판매에 의존해온 협력업체들은 도산 위기에 몰리고, 미래부는 단단히 체면을 구겼지만, 롯데홈쇼핑은 폐업의 위기를 피해 살아남았다. 롯데홈쇼핑의 ‘의문의 1승’이다.
유환구기자 redsu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