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회에 제핏잎은 신의 한 수
자리 맛은 그대로 다른 잡맛 사라져
제주 물회 원형은 된장에서 비롯
바람은 시원하지만 구름에 가리지 않은 햇살은 이제 뜨겁다. 해풍에 실린 습기가 살갗에 닿으면 아직은 냉기마저도 느껴지니 여름이 완연해지기 전의 지금을 어서 즐겨야겠다는 조급함이 생긴다. 제주는 산남과 산북의 날씨나 분위기가 달라서, 남쪽으로 달려 산남의 공기를 느끼자마자 그 조급함은 더욱 커졌다.
보목은 나에겐 인상적인 포구로 남아있다. 입도 첫 해, 낚시에 한참 빠져있을 때, 11월 말의 어두운 밤 보목과 하효 언저리를 루어대를 들고 다니며 농어를 노리고 있었다. 낚시란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그날도 농어잡기를 거의 포기하고 마지막이다 싶은 심정으로 보목포구에 섰다. 그런데 포구 안쪽으로 멸치들이 튀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뭘까 하고 던진 루어대가 갑자기 휙 꺾이며 줄이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약 20여분을 씨름한 끝에 건져 올린 것이 80㎝가 넘는 참돔이었다. 산란기를 앞둔 참돔들이 어두운 밤 멸치사냥을 위해 포구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었다.
산란기를 앞둔 생선들은 일단 맛있다. 생명을 잇기 위한 신성한 몸부림을 위해 몸을 불리고 영양을 채워두기 때문이다. 그 날 밤,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3년치 어복이라는 그 참돔의 살맛도 그러했고, 산란기를 앞둔 지금의 자리돔도 그러하다. 그러니까, 해가 점점 강렬해지고 시기의 조급함을 부르는 바람이 불면 자리돔이 제일 맛있는 시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보목은 차들과 사람들과 저마다의 기대들이 뒤섞여 들떠있었다. 보목엔 이런저런 물회집들이 많긴 하지만 대표적인 집으로는 어진이네와 보목 해녀의 집이 있다. 둘 다, 섶섬을 앞에 둔 바다풍경을 바라보면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물회를 놓고 좀 더 제주 본연의 모습을 찾자면 보목 해녀의 집이 낫다. 물론 그것이 모든 이들의 입맛을 만족시켜주지는 않는다.
손질한 자리는 등뼈와 거의 나란히 썰어 회로 낸다. 보목에서 잡히는 자리는 뼈가 연하다고는 하지만, 돔 종류의 어류 특성상 척추뼈가 억세기 때문에 가장 먹기 좋게 손질하는 방법이다. 접시 한가득 손질된 자리회가 나왔을 때, 나는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낮시간 대신 운전해 줄 사람이 없으니 이걸 소주 한 잔 없이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자리회를 먹는 방법의 화룡점정은 제핏잎이다. 살이 올라 통통한 자리만으로도 입안을 가득 채우는 풍성함과 찰진 식감을 느낄 수 있지만, 여기에 제핏잎을 넣고 같이 먹는다면 다른 잡맛이나 미세한 비린 느낌을 확실하게 잡아주기 때문이다. 자리의 맛을 그대로 두면서 다른 잡맛이 사라지는 그 완벽함에 마주한 아내는 단번에 ‘신의 한 수’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물회는 된장을 기본으로 하는 제주식에 가까운 모습이다. 양은그릇에 된장을 푼 육수에 채썬 야채와 얼음이 들어있고 그 위로 잘게 썰어낸 자리회가 올려진다. 요즘은 육지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물회들이 점점 많아져 나름 맛이 더해지고 있지만, 제주 물회의 원형은 된장에서 비롯된다. 제주여자와 결혼할 육지남자가 인사차 들른 여자의 집에서 장차 장모가 되실 분이 만들어 낸 물회 맛을 보고는 ‘내가 싫으신가 보다’ 했다고 할 정도로 솔직한 맛이 제주물회다. 양념이나 간으로 맛을 살리지 않는 제주물회는 그래서 재료가 신선하지 않으면 맛을 제대로 낼 수가 없다. 그러니 제철 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보목으로 모여드는 이유를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열심히 맛집을 찾아 다니며 내 블로그를 채우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제주의 맛집이라는 곳도 변해가는 상황들에 어쩔 수 없이 변화를 겪어가고 있고, 맛집 정보라는 것도 워낙 많다보니 나 역시 이전의 열정을 어디에 소모해야 할 지 점점 난감해진다. 그리고 이젠 사람들이 몰려 복잡한 곳들은 본능적으로 피하곤 한다. 이럴 땐, 제철 음식을 따라 기행하는 것이 차라리 덜 고민스럽다. 지금의 보목같이 사람들이 몰려 복잡함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지만, 신선한 재료의 제일 맛있는 시기는 어디에서나 공통된 맛의 정석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 제주에서는 좀 더 강조되어야 할 맛기행의 중요 포인트이다.
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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