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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눈에는 눈, 돈에는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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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눈에는 눈, 돈에는 돈

입력
2016.06.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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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도어 정비 작업 중 사망한 김모(19)군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달 30일 서울 광진구 구의역 플랫폼에 모여 있는 시민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 중 사망한 김모(19)군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달 30일 서울 광진구 구의역 플랫폼에 모여 있는 시민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2008년 9월 영국의 한 영세 지질측정업체 직원이 택지개발을 위한 토질 샘플을 채취하다 시굴갱 함몰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혼자 작업하던 이 직원의 비명소리에 땅주인들이 달려왔을 때, 그는 이미 흙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는 코와 입으로 쏟아져 들어온 흙으로 인해 사망한 상태였다. 관할법원인 윈체스터 형사법원은 2011년 2월 안전조치 미이행을 이유로 이 기업에 38만5,000파운드(약 6억6,000만원)의 벌금을 선고했다. 연간 기업 매출의 116%에 달하는 매우 과중한 벌금이었다. 판사는 말했다. “벌금 액수가 직원 네 명의 이 회사를 도산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불운하지만 불가피한 일이다. 그것은 심각한 위반의 결과다.” 영국이 오랜 사회적 논의 끝에 2007년 도입한 기업살인처벌법(Corporate Manslaughter Act)의 첫 사례다. 지구 반대편 ‘OECD 산재 사망률 1위국’에선 충격적으로 가슴을 할퀴는 얘기다.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존귀한 것이다.’ 이 명제가 보편적 참으로 통용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국인은 얼마나 될까. 눈 앞의 저 사람이 그야말로 ‘사람’이라는, 뜨거운 숨이 붙어 있는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려면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설마’를 무속신앙처럼 받드는 요행주의는 편리한 도덕적 방패가 되고, 일하다 죽는 것을 기업경영의 부수적 피해로 혜량해 주는 관대한 법은 든든한 갑옷이 된다. 성장과 효율을 맹신해온 이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행위의 절대적 옹호는 이미 불치병이다. “망하라는 얘기냐” 한 마디면 더 이상의 논쟁이 불가능하다.

세계의 모든 가치를 돈이 결정하는 곳에서 우리는 산다. 노동의 가치도, 사랑의 가치도, 목숨의 가치도 돈이 정해준다. ‘돈도 좋지만’은 한낱 췌사가 되어 ‘돈이 최고지’ 앞에 무력하다. “심각한 위법이지만 회사가 도산에 이를 수도 있으므로 벌금 감면이 불가피”한 나라에 살면서 생명 존중을 몸에 익혔다면, 차라리 그것이 기적이다. 구의역에서 홀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목숨을 잃은 김모(19)군의 월급이 144만원이 아니라 441만원이었어도, ‘2인1조’의 작업 원칙이 안 지켜졌을까. 법과 규정이 지시하는 선제적 안전조치는 대개 부의 주변을 맴돌고, “그랬다간 큰일이다”와 “설마 별 일 있을라고”의 심리기제는 돈의 향방을 좇아 선택적으로 작동한다. 목숨값의 계급도를 내면에 장착하고, 도저히 되지 않는 일-고작 5, 6명이 49개 지하철역 스크린도어를 관리·수리하는 일 같은 것-을 어찌 됐든 해내라고 요구하는 것. 그것이 인구 1만명당 6.8명의 압도적 산재사망률 1위 국가가 된 연유다. ‘너는 얼마짜리냐’ 묻는 시선과 행태가 ‘미션 임파서블’의 적외선 감시망처럼 횡행하는 곳에서 초(!)저임금 근로자를 위한 안전장치와 매뉴얼이라니. 잔인한 농담 아닌가.

영국의 기업살인법은 기업의 극단적으로 무책임하고 위험한 행위로 일어난 직원 및 공중의 사망사건에 대해 벌금에 상한을 두지 않는다. 법의 취지 자체가 “기업이 안전한 근무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경영에 영향을 주기 충분한 금액을 벌금으로 부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기업살인이라는 명칭은 안전조치 미비로 인한 산재 사망이 우발적 사고가 아닌 구조적 살해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의도적 프레임이다.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20대 국회 개원과 함께 기업살인법 도입을 선언했다. 막대한 벌금으로 산재 사망에 책임을 지우는 기업살인법은 돈 말고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이 지독한 배금주의사회에 인간성 회복을 불러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이 땅에 태어난 이상 목숨값만은 모두 동일하게 조정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다. 생명의 가치를 돈의 힘을 빌지 않곤 복구할 방법이 없다는 데 서글픔을 느낀다. 허나 어쩌랴. 이 사회를 움직이는 공리가 눈에는 눈, 돈에는 돈인걸.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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