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방송된 tvN 드라마 ‘또 오해영’ 7회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진상(김지석)이 동료 변호사(연우진)를 시켜 ‘헌팅’으로 위장해 해영(서현진)에게 접근했다가 결국 덜미를 잡히는 장면에서 기자는 이 드라마의 성공비결 중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 도경(에릭)에게서 해영을 떼어 놓기 위해서였다는 진상의 말에 독이 잔뜩 오른 해영은 이렇게 맞섭니다. “박도경이 무슨 재벌가 아들도 아니고 왕족도 아니고. 내가 잘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허름한 여자 취급 받아본 적도 없거든?”
로맨스 드라마를 사랑하는 시청자들은 참 오랜 시간 동안 재력, 외모 다 되는 ‘재벌남’과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심성만은 곱디 고운 ‘궁상녀’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재벌남의 박력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간 백화점에서 궁상녀는 여러 벌의 옷을 바꿔 입고 나왔고 다리를 꼰 채 소파에 기댄 남자는 가벼운 박수로 화답합니다. “이거 다 계산해줘요.”
궁상녀는 또 다시 이끌려 간 재벌가 자제들의 파티에서 갖가지 굴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건 재벌남의 얄미운 ‘여사친’(여자인 친구를 뜻하는 말)이 전문입니다. “저 빈티나는 여자는 어디서 데려온 거야?” 이 여자의 말보다 더 복장이 터지는 건 자신의 빈티를 수긍하며 눈물만 뚝뚝 떨구는 궁상녀의 모습이었습니다. 세상 가련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죠.
‘또 오해영’이 반가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해영의 말처럼 남자주인공 도경은 재벌은커녕 사업 병에 걸려 돈 쓰고 망하기 바쁜 엄마 때문에 계좌이체를 밥 먹듯 해야 하는 불쌍한 아들일 뿐입니다. 반대로 부모에게서 때론 부담스러울 정도의 넘쳐 흐르는 사랑을 받고 자란 해영은 늘 스스럼이 없고 당당합니다. 동기들에게 밀려 승진은 누락되지만 잘 나가는 외식업체에서 자기 주도 하에 프로젝트를 이끄는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자존감도 커 보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못살게 구는 상사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면 그만이란 강인한 멘탈의 소유자이기도 하죠.
똑같은 이름의 잘난 친구(전혜빈)와 비교되며 암울한 학창시절을 보냈고 결혼 전날 차이는 굴욕을 당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게 된 남자 앞에서 적어도 기는 죽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도경에게 오히려 “언젠가 나 때문에 울거야”란 뻔뻔한 말을 남기고 “나 원래 쉽다”며 대놓고 애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걸그룹 걸스데이 민아와 ‘로코퀸’ 황정음을 각각 내세운 SBS 주말드라마 ‘미녀 공심이’와 MBC 수목드라마 ‘운빨로맨스’에 아쉬움이 듭니다.
두 드라마에서 못난 얼굴과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여주인공들은 특유의 발랄함과 긍정적인 마인드로 난관을 헤쳐나가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 둘 주변엔 각각 재벌3세와 게임회사 대표란, 이들을 구제해주고도 남을 재력의 남성들이 등장합니다. 복잡한 사정을 거치지만 결국에는 이 남성들이 운영하는 회사에 고용된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걸그룹 출신인 사실을 잊게 만드는 민아의 연기력과 역시나 로맨스에 최적화된 표정을 선보이는 황정음의 코믹 연기를 보는 즐거움과는 별개로 ‘또 재벌이야?’ 란 생각에 한숨이 나오기까지 합니다. 또 한편의 터무니 없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봐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우려도 섞입니다.
허구라지만 드라마도 시대상을 반영하기 마련인 까닭에 드라마 속 여성들도 꾸준한 지위 향상을 경험해왔습니다. 드라마의 주 시청층이 여성임을 고려할 때 백마 탄 왕자님의 등장이란 판타지를 포기할 수 없는 제작진의 사정도 이해는 갑니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가까운 미래를 본다는, 어쩌면 세 드라마 중 가장 비현실적인 설정을 지닌 ‘또 오해영’이 가장 현실적인 드라마란 찬사를 받으며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진짜 옆집 언니 같은 서현진의 생활 연기도 큰 몫을 차지할 겁니다. 무엇보다 오해영이 남자주인공의 경제력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 앞에서마저 입을 다무는 신데렐라가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사랑 받을 자격이 충분해 보입니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